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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생 | 1720. 4. 23, 리투아니아 시엘레크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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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망 | 1797. 10. 9, 러시아 빌뉴스 |
국적 | 리투아니아 |
요약
빌뉴스의 가온(유대교의 정신적 지도자에게 주어졌던 칭호).
Elijah Gaon이라고도 하며, Ha-Gaon Rabbi Eliya-hu의 두문자어(頭文字語) Ha-Gra라고도 함. 정식 이름은 Elijah ben Solomon Zalman.
18세기 리투아니아 유대인들의 종교 및 문화 생활의 뛰어난 권위자이다.
유대교 전승뿐만 아니라 철학·문법·민간의술까지 두루 공부했고, 당시의 경건주의적 신비주의 운동인 하시디즘을 미신적·비학문적이라는 이유로 열렬히 반대했으며, 하시디즘 운동의 지지자들을 파문하는 선언문에 서명했다. 직접 책을 쓰지는 않았지만, 제자들이 받아 적은 강의록들과 연구서 본문 여백에 남긴 그의 기록들을 근거로 40권이 넘는 책이 편찬되었다.
오랜 전통을 지닌 학자 가문에서 태어나 어릴 때부터 빠른 학습속도와 뛰어난 기억력 등 비범한 재능을 발휘해 유명해졌으며, 죽는 날까지 이 재능을 갖고 있었다.
18세쯤에 결혼하여 빌뉴스에 정착한 뒤 참회를 위해서 폴란드·리투아니아·독일의 유대인 공동체들을 두루 찾아다니는 갈루트('유배'라는 뜻) 여행길을 떠나 1748년에 돌아왔으며 그후 이곳을 떠난 적이 없다. 그뒤 평생을 동유럽 유대인들의 문화 중심지였던 빌뉴스에서 연구·기도·환상·명상에 몰두하는 한편, 자기에게 배우기로 작정한 학생들을 선발하여 가르치면서 유대인 공동체를 이끌었다.
빌뉴스 공동체는 엘리야 벤 솔로몬의 조상 가운데 한 사람이 자기 가문 출신의 학자들을 지원하기 위해 내놓은 기금에서 주로 조달된 연금으로 그를 지원했다. 이로 인해 그는 뚜렷한 직위를 갖고 있지 않았는데도 유대인 공동체로부터 회당 랍비보다 더 많은 월급을 받았다. 이 공동체가 이렇게 한 것은 그가 모범적인 생활을 하고 자진해서 공동체를 이끌었기 때문이다.
그의 인간관과 역사 속에서 자아를 실현하려는 투쟁은 모든 개인에게는 '자기 영혼의 독특한 근원과 육체의 특성에 따른' 나름대로의 길이 있다는 가정에 바탕을 둔 것이었다.
역사의 첫 시기에 예언자들은 각 사람에게 각자의 진로를 밝혀주었으나, 예언이 끝난 다음 시대에는 각 개인이 내면에 눈을 돌려 스스로 자신의 길을 찾아야 했다. 그는 멸망해가는 현시대에도 이론상으로는 이러한 길을 여전히 찾을 수 있지만 유혹과 속임수가 난무하고 성행한다고 주장하면서, 영적인 안전은 변함없는 토라(신의 길잡이, 즉 율법)를 따르는 데 있다고 했다.
엘리야 벤 솔로몬의 영적 생활의 특징은 두드러진 개인의 역량과 지도력에 있었다.
사물을 유별나게 빨리 파악하는 재능을 꾸준히 유지했고, 끊임없는 분석과 반복을 게을리하지 않았다. 이것은 스스로 '혹독하다'고 말한 지적인 자기훈련이었다. 그는 학문적인 통찰력과 환상으로 가득한 꿈을 많이 꾸었으나 모두 무시했다. 실제로 잠든 동안에 꿈을 통해서 얻은 지식을 싫어했는데, 그 이유는 정신이 맑은 가운데 의식적인 지적 노력을 통해 하느님을 예배하려고 했기 때문이다. 하늘의 천사들과 사자들이 중간에서 전달해주는 것이라 하더라도 위에서 내려온 은혜는 사람을 그릇된 방향으로 이끄는 것이라고 보았다.
많은 환상을 보았으나, 그 안에 악한 세력들이 숨어 있을지도 모른다는 우려 때문에 더욱 의심했다.
그는 〈탈무드〉·미드라시(전통적인 해석 및 주석 문학)·성서주석뿐만 아니라 신비주의 문헌과 민담에 담겨 있는 전통 유대교 학문의 모든 분야에 걸쳐 방대한 지식을 갖고 있었으며, 이것은 철학·문법·민간의술에 대한 그의 깊은 관심 및 지식과 조화를 이루었다.
그는 공부하는 것이 하느님을 섬기는 최선의 길이며 다른 사람들을 이끄는 진정한 방법이라고 여겼으며, 학자는 넘쳐흐르는 지식을 전해야 한다고 믿었기 때문에 밤낮을 가리지 않고 공부했다. 그는 비유로 설명하기를, 가운데 놓인 큰 그릇에 물이 넘쳐흘러 곁에 놓인 작은 그릇들(학생들)을 채우고, 이 그릇들은 다시 곁에 놓인 다른 작은 그릇들을 채우므로 중심에 자리잡은 스승은 모든 사람들에게 영향을 끼친다고 했다. 그는 이 이론을 실천하여 매우 유능하고 영향력있는 학생들로 구성된 작은 집단을 불러모았는데, 이들은 대부분 랍비이거나 설교자들이었다.
이 가운데 뛰어난 사람은 리투아니아 예시바(탈무드 학교)를 새로운 형태로 설립하고 엘리야 벤 솔로몬을 계승하여 리투아니아 유대인 사회를 이끈 볼로진의 랍비 하임 벤 이삭과 순회설교자로서 큰 명성을 떨치고 새로운 학파와 설교 형태를 만든 야코프 벤 볼프 크란츠였다.
그는 대체로 공개적인 활동을 피하고, 오로지 연구에 바탕을 둔 지도력과 가르침을 끊임없이 베푸는 독특한 형태로 몇 가지 활동에 적극 참여했다.
공개적 활동 가운데 가장 두드러지고 오래 지속한 것은 하시디즘에 조금도 양보하지 않고 맞서 싸운 일로서, 1772년부터 죽을 때까지 이 싸움을 계속했다. 하시디즘을 '우상숭배'나 미신과 다름없는 저속하고 반학문적인 운동으로 규정하고서 이를 우려하고 멸시했으며, 이 운동 지지자들을 파문하는 내용의 선언문에 서명했다. 그는 하시디즘 지지자들이 기적과 환상을 열망하고, 그들의 지도자(tzaddiq)에게 아첨하고, 술과 춤에 힘입어 집단적인 쾌락을 추구하는 것은 자신이 배척한 모든 것을 전파하는 것과 다름없다고 생각했다.
더 나아가 그들이 기도를 강조하는 것은 자신이 거룩하게 다루고 있는 토라 연구의 우월성을 공격하는 것으로 보았다.
밤낮을 가리지 않은 채 끊임없이 연구하고, 강의를 통해 직접 가르치는 일에 몰두하고, 상세한 본문 비평 및 교정에 관심을 쏟고, 게다가 학문의 진척 속도가 빨랐다. 현존하는 그의 모든 글은 제자들이 받아적은 강의 기록과 자신이 직접 본문 여백에 쓴 짤막한 기록들로 이루어져 있다.
오늘날 이 내용들을 한데 합쳐 그가 관심을 가졌던 모든 분야를 망라한 40여 권 이상의 책으로 편집했으나, 일부 자료들은 아직 필사본으로 남아 있다. 시온주의가 승리를 거둘 것을 예언한 〈멧비둘기의 소리 Kol hator〉라는 예언 저서가 그의 작품으로 간주되었으나, 그 주요내용들을 미루어볼 때 현대의 위작(僞作)일 가능성이 높다. 그가 후대에 이바지한 중요한 점은 유대인의 근대성이 아직 걸음마 단계에 있을 당시 전통적인 방식으로 하느님을 지적으로 사랑하는 모범을 보여준 데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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