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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페르농

다른 표기 언어 Jean-Louis de Nogaret de la Valette, duc d'Épernon 동의어 장 루이 드 노가레 드라 발레트 에페르농 공작
요약 테이블
출생 1554. 5., 프랑스 코몽
사망 1642. 1. 13, 로슈
국적 프랑스

요약 프랑스의 귀족.

16세기에서 17세기로의 전환기에 프랑스 정계에서 막강한 권력을 행사했다.

신분이 낮은 귀족 가문출신인 그는 앙리 3세의 총신으로 두각을 나타냈으며, 1582년 공작작위를 받았다.

그와 안 드 주아외즈는 1580년대에 사실상 총리로 활약했다. 그는 탐욕스러움으로 악명이 높았으나 뛰어난 정치력과 활동력을 과시했으며, 앙리 3세 치세기에 일어난 여러 차례의 내란에서 왕권을 수호하는 데 큰 공헌을 했다.

잠시 왕의 총애를 잃기도 했으나 1588년 기즈 공작 앙리의 살해사건 이후 다시 왕의 환심을 얻었으며, 장차 앙리 4세로 즉위하는 나바라의 엔리케와 화해할 것을 왕에게 조언했다. 1589년 앙리 3세가 시해당하자 그는 처음에는 나바라의 엔리케에게 복종하기를 거부했다. 나바라의 엔리케는 당시까지 프로테스탄트였으며 스페인과 밀약을 맺기까지 했던 인물이었다. 그러나 나바라의 엔리케가 앙리 4세로 즉위하자 에페르농은 충성스런 신하로 자처하며 다시 궁정에 모습을 드러냈다. 앙리 4세의 치세기에 모든 음모에 가담했으나 한 번도 발각되지 않았다. 프랑수아 라바야크에 의한 국왕 시해사건을 그가 도왔다고 믿을 만한 근거가 있다. 라바야크는 에페르농의 정부인 카트린 뒤 티예로부터 돈을 받은 것으로 알려졌으며, 또한 1610년 5월 14일 시해사건이 일어난 후 하루 동안 에페르농으로부터 보호를 받았다. 그뒤 에페르농은 소규모 쿠데타를 일으켜 마리 드 메디시스를 앙리 4세의 어린 아들 루이 13세의 섭정으로 앉혔다. 그러나 마리 드 메디시스는 에페르농을 자신의 정부에 입각시키지 않았다. 1617년 루이 13세가 권력을 장악한 후 에페르농은 왕의 미움을 샀으나, 1619년 블루아에 유배중이던 마리 드 메디시스의 탈출 계획을 세워주고 뒤이어 일어난 내란에서 그녀를 지원함으로써 루이 13세에게 앙갚음을 했다. 1622년 기옌의 총독에 임명되었다. 기옌에서는 매우 무절제하고 사치스럽게 생활했으며 가끔씩 보르도의 대주교와 다툼을 벌이기도 했다. 1638년 리슐리외에 의해 총독직을 박탈당했으며 1641년 로셰로 추방당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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