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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드워즈의 중기생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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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샘프턴에서의 목회

1729년 스토더드가 죽자 에드워즈는 매사추세츠 주에서 보스턴을 빼고는 가장 중요한 노샘프턴 교회의 강단을 혼자 맡아야 했다.

맨 처음 출판된 설교로서, 1731년 보스턴 성직자들을 대상으로 설교한 〈하느님에 대한 인간의 철저한 의존, 구속의 역사, 그의 완전하심을 통해 영광을 받으시는 하느님 God Glorified in the Work of Redemption, by the Greatness of Man's Dependence upon Him, in the Whole of It〉에서 에드워즈는 뉴잉글랜드 사람들이 신앙과 도덕의 자만심에 빠져 부도덕한 일을 저지른다고 비판했다.

또한 하느님만이 신자들의 모든 선이기 때문에 사람을 낮추고 하느님을 높이는 신앙이 구원의 유일한 방도라고 주장했다. 그러나 당시 영국 식민지 개척자들은 진취적인 정신을 갖고 있었기 때문에, 영국국교회만이 아니라 국교회 반대자들에게도 널리 퍼진 아르미니우스주의(네덜란드의 신학자 야코부스 아르미니우스에게서 유래됨)를 쉽게 받아들였는데, 아르미니우스주의는 인간을 무능하게 만드는 원죄의 효과들을 최소화했고, 자유주의를 강조했으며, 도덕성을 종교의 핵심으로 삼는 경향이 있었다.

에드워즈는 이런 견해들에 맞서 1734년 11월 '믿음으로만 의롭게 됨'에 관해 연속 설교를 한 결과, 1734년 겨울부터 1735년 봄까지 노샘프턴과 코네티컷 강 계곡을 따라 형성된 마을들에서 대부흥운동이 일어났으며, 이 기간 동안 300명이 넘는 사람들이 에드워즈의 설교를 듣고 신앙고백을 했다.

그 뒤에 쓴 보고서 〈하느님의 놀라운 사역에 관한 신실한 이야기 A Faithful Narrative of the Surprising Work of God〉(1737)는 특히 회개 체험의 유형들과 단계들을 묘사하여 미국과 유럽에 깊은 감명을 주었다. 1740~42년 식민지(미국) 전역에서 대각성운동이 일어났다. 영국 감리교 운동에서 큰 성공을 거둔 복음전도자 조지 화이트필드와 뉴저지 출신의 장로교 목사 길버트 테넌트는 많은 대중을 끌어모았으며, 감정에 호소하는 설교를 통해 격렬한 감정적 반응과 대중의 회개를 이끌어냈다.

에드워즈 자신은 비교적 청중들을 차분하게 다루기는 했지만, '분노한 하느님의 손 안에 있는 죄인들'이라는 제목으로 엔필드에서 한 설교(1741)처럼 '두려움을 자아내는 설교'를 여러 차례 했다.

대각성운동은 회개와 생활의 변화를 일으키기도 했으나, 무절제와 무질서, 교회와 세속사회의 분열을 가져오기도 했다. 이로 인해 부흥운동과 관련된 태도들과 관습들에 대해서 비판하는 목소리가 점차 커져 화이트필드 개인을 비판하는 데까지 이르렀지만, 에드워즈는 그것이 하느님의 참된 사역이며, 그 사역을 더 증진하고 더 순결하게 할 필요가 있다는 입장을 계속 유지했다.

대각성운동을 옹호하고 비판하기 위해 그는 〈성령 사역의 독특한 표지들 The Distinguishing Marks of a Work of the Spirit of God〉(1741)·〈최근 뉴잉글랜드에서 일어난 신앙 부흥에 대한 몇몇 사람들의 견해 Some Thoughts Concerning the Present Revival of Religion in New England〉(1742)·〈신앙적 감동에 관한 논문 A Treatise Concerning Religious Affections〉(1746) 등을 썼다.

〈신앙적 감동에 관한 논문〉에서 에드워즈는 부흥운동을 비판하는 사람들이 내세운 냉정하고 '합리적인' 신앙관을 반박하면서 '모든 참된 종교의 본질은 거룩한 사랑'이며, 그 사랑의 순수성은 내적인 성품과 실천결과들에 의해 입증된다고 주장했다.

1749년 에드워즈는 〈반성 Reflections〉이라는 글과 함께 젊은 부흥운동가 데이비드 브레이너드의 회고록을 편집했다. 장로교 선교사가 되어 델라웨어 원주민들을 선교하고 1747년 젊은 나이에 죽은 브레이너드에 관한 이 책은 큰 영향을 미친 선교사 전기가 되었다.

또한 '이 세상에 신앙 부흥을 일으키고 그리스도의 왕국을 증진하기 위한' 국제 '기도협조'를 제안받자, 이를 지원하기 위해 〈특별한 기도 안에서 하느님의 백성을 하나되게 하기 위한 작은 노력 Humble Attempt to Promote Explicit Agreement and Visible Union of God's People in Extraordinary Prayer〉(1747)을 썼다. 그는 이 책에서, 〈요한의 묵시록〉에서 천년왕국에 앞서서 온다고 예언한 '대환란'은 이미 지나갔으므로 교회는 복음이 사람들 사이에서 꾸준히 성공을 거둘 것을 내다볼 수 있다고 주장함으로써 선교활동을 가로막는 주된 이념적 장벽을 제거하도록 도왔다.

노샘프턴에서의 파면

한편 에드워즈와 교회 회중들의 관계는 점점 나빠져갔다.

그 한 가지 이유는 에드워즈가 성찬식에 참여할 수 있는 조건들에 대한 입장을 변경했기 때문이다. 그당시 통용되던 '불완전 서약'(Halfway Covenant)에 따르면, 교인 자녀들 가운데 세례는 받았으나 회개의 증거를 제시하지 않은 사람들도 '계약에 힘입어' 자녀들이 세례를 받게 할 수 있었다. 스토더드는 비록 회개의 증거는 제시하지 않았지만 '계약 안에 있는' 모든 사람을 성찬식에 받아들이는 당시의 관습을 노샘프턴 교회에서 채택하도록 했다.

이에 반해 에드워즈는 점차 성찬식에 참여하는 데 필요한 신앙고백은 교리 지식과 도덕적 선행만이 아니라 참된 신앙을 담은 것으로 이해되어야 한다고 믿게 되었다. 1749년 에드워즈는 위와 같은 입장을 공식적으로 발표함으로써 격렬한 논쟁을 불러일으킨 끝에 결국 해고되었고, 1750년 7월 1일 엄숙하고 절제된 심정으로 '고별설교'를 했다.

이 논쟁이 벌어지고 있는 동안 〈성찬식에 참여할 수 있는 자격 Qualifications for Communion〉(1749)·〈솔로몬 윌리엄스 목사의 책에 대한 한 응답 가운데 잘못된 견해를 바로잡고 진리를 옹호함 Misrepresentations Corrected, and Truth Vindicated,in a Reply to the Rev. Mr. Solomon Williams's Book〉(1752)을 썼는데, 앞의 책은 그 자신이 섬기던 교회 회중들을 깨우치기 위해서 쓴 것이고, 뒤의 책은 코네티컷 레바논 교회의 동료 목사가 자기 견해를 오해했다고 보고 그것을 해명하기 위해서 쓴 것이다.

에드워즈는 논쟁에서 패하기는 했으나 그의 입장은 결국 승리를 거두어 뉴잉글랜드 회중교회에 교도 자격에 관한 교리를 제공해주었다(독립교회파). 그것은 국교 폐지 이후 회중교회가 처한 상황에 더 적절한 교리가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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