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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생 | 1175(?). 11. 20, 잉글랜드 버크셔 애빙던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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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망 | 1240. 11. 16, 프랑스 수아지 |
국적 | 영국 |
요약
축일은 11월 16일. 영국의 학자, 캔터베리 대주교.
본명은 Edmund Rich.
자신의 의견을 기탄없이 말했던 매우 덕망이 높고 매력적인 성직자였다. 그의 문학 작품은 후대의 종교 작가들에게 큰 영향을 미쳤다. 옥스퍼드(이곳에서 그는 영원히 순결을 지키기로 맹세했음)와 파리에서 공부한 뒤 강의도 했는데(1194경~1200), 최초로 아리스토텔레스의 철학을 강의했다고 전해진다.
파리에서 신학을 좀더 공부한 뒤 다시 옥스퍼드로 돌아와 강의했고(1214경~22), 이때 월트셔에 있는 솔즈베리 대성당의 참사회원이 되었다. 1227년에는 캔터베리 대주교에 오를 때 도움을 받은 교황 그레고리우스 9세의 요청에 따라 잉글랜드에서 제6차 십자군 원정을 지지하는 설교를 했다.
얼마 뒤 에드먼드는 교권을 수호하고 잉글랜드 왕 헨리 3세의 대륙정책을 비판하다가 그와 심각한 불화를 빚었다. 헨리 3세에 대한 반발로 잉글랜드 귀족들은 에드먼드편을 들었다. 내전의 기운이 일었으나 에드먼드는 헨리 3세를 파문하겠다고 위협해 왕비의 야심 만만한 프랑스 친척들과 그 일당을 잉글랜드에서 내쫓고 그들의 계획을 포기하도록 했다.
나아가 헨리 3세에게 잉글랜드의 법, 관습, 토착 귀족들의 조언에 따를 것을 약속하게 했다. 1236년 헨리 3세는 교황에게 오토 추기경을 특사로 보내줄 것을 요청했는데, 그는 이듬해 도착했다. 오토로 인해 대주교로서 에드먼드의 영향력은 약화되었다. 헨리 3세는 캔터베리의 수사들을 부추겨 에드먼드의 권위에 반대하게 했는데, 오토가 이 문제에 대해 침묵을 지켜 에드먼드는 곤경에 빠졌다. 그는 결국 헨리 3세에게 항의하고 대주교 관구의 자유를 침해한 모든 사람을 일괄해서 파문한 뒤 이 일을 로마 교황청에 호소할 계획으로 로마로 떠났다. 그러나 여행 도중 건강이 나빠져 수아지에서 죽었다. 그는 퐁티니 대수도원에 묻혔다. 그의 지지자들은 즉각 그를 성인으로 추증해달라고 요구했으나, 헨리 3세의 반대로 1247년까지 뜻을 이루지 못했다. 비록 에드먼드가 영국의 최고 성직자 위치에 오른 상태에서 위기를 맞아 이에 대처하지 못했다 할지라도 그의 순수한 동기와 고결한 이상은 모든 사람에게 존경을 받았다. 성 에드먼드가 썼다고 전하는 여러 글 중에서 〈교회론 Speculum ecclesiae〉이 그의 것으로 여겨진다. 이 책은 널리 알려진 신앙 논문으로서 중세 신학발전에 크게 공헌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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