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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생 | 1897. 2. 27, 미국 필라델피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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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망 | 1993. 4. 8., 오리건 포틀랜드 |
국적 | 미국 |
요약 20세가 미국의 성악가. 흑인 최초로 메트로폴리탄 오페라 극장에 섰다. 필라델피아 출생으로 얼음장수의 딸로 태어나 6세 때 성가대원으로 참여했다. 1925년 뉴욕 필하모닉 주최 콩쿨에 합격해 협연했고 1928년 카네기홀에서 첫 공연을 했다. 1935년 잘츠브루크음악제에서 연주하는 등 차별에 맞서 다양한 활동을 폈고 1941년에는 보크 상의 수상자가 되어 상금 1만 달러로 장학 재단을 만들기도 했다. 1965년 은퇴 이후 1993년에 96세의 나이로 별세했다.
미국의 성악가. 당대 최고의 콘트랄토 가수의 한 사람이었다. 가난한 흑인 부모에게서 태어나, 연합 침례교회의 성가대에서 최초의 성악 훈련을 받았다. 6세 때 성가대에 참여하여 뛰어난 목소리를 들려주었으며, 그 교회에서는 메리언 앤더슨이 개인 성악 교습을 받을 수 있게 돈을 모아주었다.
1925년 메리언 앤더슨의 선생은 뉴욕 시에 있는 루이전 스타디움에서 뉴욕 필하모닉 오케스트라와 협연하기 위한 경연대회에 그녀를 참가시켰다. 앤더슨은 300명의 참가자 가운데 최고 점수를 얻었다. 앤더슨은 가난, 인종적 차별과 싸워가며 여러 차례 콘서트 여행을 하여 명성을 떨치기 시작했다. 진정한 성공은 1925~35년 몇 차례의 유럽 콘서트 여행 후에 찾아왔다. 그 여행에서 성악가로서 경험의 폭을 넓혔고 깊이를 더했으며, 1935년 뉴욕 시로 돌아와서는 보다 큰 성공을 거두게 되었다.1939년 피부색 때문에 워싱턴 D. C.에 있는 컨스티튜션 홀에서 노래부르는 것이 금지되었다.
그 결정에 대한 항의 표시로 엘리노어 루스벨트를 포함한 시민들은 링컨 기념관에서 콘서트를 열었고, 이 콘서트에 7만 5,000명의 청중이 모여들었다. 메리언 앤더슨은 백악관에 초청되어 노래를 불렀고, 1955년 베르디의 오페라 〈가면 무도회 Un ballo in maschera〉의 울리카로 데뷔함으로써 뉴욕 시의 메트로폴리탄 오페라에서 노래한 최초의 흑인이 되었다. 앤더슨은 가창력과 음악해석 능력뿐만 아니라 흑인들을 위한 노력과 따뜻한 성품으로도 찬사를 받았다. 가수로서의 특성은 넓은 음역, 풍부한 음량, 순수한 음색, 다양한 양식의 정통함에 있다.
자서전 〈My Lord, What a Morning〉(1957)을 썼고 1952년과 1959년 두 차례 한국을 방문·공연한 바 있으며, 1965년 은퇴했다. 1978년 미국 대통령 지미 카터는 메리언 앤더슨에게 그녀의 옆얼굴이 새겨진 명예훈장(Congressional gold medal)을 수여했다. 1993년 96세의 나이로 세상을 떠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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