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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생 | 1723(?)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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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망 | 1770. 3. 5, 보스턴 |
국적 | 미국 |
요약 보스턴 학살사건을 촉발시킨 식민지 저항운동의 지도자·순교자.
사망 이전까지의 생애는 아직도 신비에 싸여 있다. 대부분의 역사가들은 그가 흑인이었다고 하지만 아메리카 인디언이라고 말하는 사람들도 있으며 또 아메리카 인디언과 흑인의 혼혈이었다고 주장하는 사람들도 있다.
1750년 가을 매사추세츠 프레이밍햄의 한 농장주가 크리스퍼스라는 이름의 탈주노예를 찾는 광고를 냈는데, 이 노예가 바로 미국 독립전쟁의 첫번째 희생자가 된 크리스퍼스 애턱스와 동일 인물일 것으로 여겨지고 있다. 노예생활에서 탈출한 후부터 영국군 병사들의 손에 죽을 때까지 20년이라는 세월 동안 고래잡이 배에서 상당기간을 보냈을 것으로 짐작된다.
1770년 3월 5일 저녁 그는 주로 선원들로 구성된 약 50~60명의 무리를 이끌고 덕스퀘어를 출발해 킹스트리트에 있는 영국군 막사로 갔다. 존 애덤스에 의하면, 애턱스는 영국군의 저지를 물리치고 긴 막대기로 프레스턴 대위를 치려 했다가 실패하자 한 영국군의 총검을 잡아챘다고 한다. 그러나 새뮤얼 애덤스의 주장에 따르면 영국군의 공격을 유발할 만한 행동은 하지 않았다고 한다. 영국군 병사들이 발포를 했고 3명의 미국인이 즉사했으며 2명은 치명상을 입었다. 애턱스는 제일 먼저 쓰러졌다. 시신은 패니얼 홀로 옮겨졌으며 그곳에 안치되었다가 3월 8일 다른 희생자들과 함께 합장되었다. 1888년 그의 기념비가 보스턴 광장에서 제막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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