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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생 | 1796. 2. 8, 프랑스 파리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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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망 | 1864. 9. 1, 파리 |
국적 | 프랑스 |
요약 프랑스의 정치·사회·경제 이론가.
생시몽 운동의 주도급 인물로 괴짜이긴 했으나 19세기 프랑스의 경제적·기술적 혁신에 심대한 영향을 미쳤다(→ 생시몽주의).
에콜 폴리테크니크에서 공부한 후 두루 여행을 다녔고 파리의 여러 비밀결사에 자주 출입했다. 사회개혁가 생 시몽을 알게 되면서(1825) 곧바로 열렬한 추종자가 되어 생 시몽의 사상을 전달하는 중요수단이었던 〈글로브 Le Globe〉지를 발간하는 데 협력했다.
생 시몽이 죽은 뒤(1825. 5), 생 타망 바자르와 함께 종교적 성격을 띠기 시작한 그 운동의 두 '대부'로 등장했다. 두 사람은 1831년에 결별했는데, 그 이유는 바자르가 정치운동을 선호한 반면에 앙팡탱은 정치와 무관한 도덕혁명과 사회혁명을 추구했기 때문이었다.
종종 '대부 앙팡탱'(Père Enfantin)이라 불렸으며 추종자들과 함께 메닐몽탕에 시범공동체를 건설했다(1832). 그러나 그는 불법적인 비밀단체를 후원하고 공중도덕에 위배되는 행동을 부추겼다는 이유로 곧 투옥당했다. 석방된 뒤 몇몇 제자와 함께 영원한 '대모'(mère suprême)를 찾아 이집트로 여행을 떠났으며 아울러 지중해와 홍해를 연결하는 운하를 건설할 계획을 세웠다(1837). 2가지 일에 모두 실패하고 파리로 돌아왔으나(1837), 뛰어난 기술적 재능을 인정받아 알제리 과학위원회 위원으로 임명되었다.
그는 평생 동안 많은 글을 썼다. 1829년 〈생 시몽의 교리 Doctrine de St. Simon〉, 1831년에는 〈생 시몽의 종교, 정치경제학과 정치학 Religion Saint-Simonienne, Économie politique et politique〉을 발표했다. 계속해서 〈정치서신 Correspondance politique〉(1835~40)·〈철학·종교 서신 Correspondance philosophique et religieuse〉(1843~45)·〈알제리의 식민지화 Colonisation de l'Algérie〉(1843)를 발표했다.
죽기 직전에 일종의 영적 증언서인 〈영생·과거·현재·미래 La Vie eternelle, passée, présente, future〉(1861)를 저술했다. 그밖에 생 시몽과 그의 저작을 엮은 총 47권짜리 전집이 출판되었다(1865~78).
1845년에 당시 프랑스의 경제발전에 중요한 역할을 하던 친구들과 옛 제자들의 영향력에 힘입어, 새로 생긴 리옹철도회사의 발기인으로 초빙되었고 곧 이 회사의 초대 이사로 지도적인 인물이 되었다. 기술과 재정 분야의 계획에 계속적으로 큰 영향을 미쳤으며, 사회적으로 생산적인 활동을 하는 사람에게 싼 이자로 자본을 대출해주는 국책 은행인 부동산 담보 대부 은행을 세워야 한다는 주장을 최초로 제기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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