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심희수

다른 표기 언어 沈喜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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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생 1548년(명종 3)
사망 1622년(광해군 14)
국적 조선, 한국

요약 심희수는 1606년 선조 때 좌의정, 1608년 광해군 때 우의정을 지냈다.
1568년 성균관에 입학, 1572년 별시문과에 급제하여 승문원에 등용되었다. 1589년 헌납으로 있을 때 정여립의 모반을 다룬 기축옥사가 확대되는 것을 저지하려다 사직했다. 1591년 응교로 선위사에 임명되어 동래에서 일본 사신을 맞았다. 1592년 임진왜란 때 의주로 선조를 호종했고, 그 뒤 대사헌·이조판서·양관대제학·좌우찬성·좌의정 등을 역임했다. 선조가 죽고 광해군이 즉위한 뒤 이이첨등이 국권을 좌우하며 임해군을 해치려 하자 그 부당함을 상소했다. 탄핵을 받은 뒤 조정의 기강이 날로 어지러워지자 병을 이유로 사임을 청했으나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1616년 명나라에 다녀온 허균과의 갈등으로 축출되어 둔지산에 들어가 은거했다.

본관은 청송. 자는 백구(伯懼), 호는 일송(一松)·수뢰누인(水雷累人). 아버지는 승문원정자 건(鍵)이며, 명종비 인순왕후(仁順王后)의 종제(從弟)이다. 노수신(盧守愼)의 문인이다. 1568년(선조 1) 성균관에 입학했고, 1570년 성균관 대표로 이황(李滉)의 장례에 참석했다.

1572년 별시문과에 급제하여 승문원에 등용되었고, 1583년 사가독서했다. 1589년 헌납으로 있을 때 정여립(鄭汝立)의 모반사건을 다룬 기축옥사가 확대되는 것을 저지하려다 조정의 의견과 맞지 않아 사직했다. 1591년 응교로 선위사(宣慰使)에 임명되어 동래에서 일본 사신을 맞았다. 1592년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의주로 선조를 호종했다. 중국어에 능통하여 도승지로 임명되어 명나라 장군 이여송(李如松)을 영접했다. 그뒤 형조판서를 거쳐 호조판서가 되어 접반사(接伴使)로 명나라 경략 송응창(宋應昌)을 맞았고, 대사헌·이조판서·양관대제학·좌우찬성·좌의정 등을 역임했다.

좌의정으로 재직중 선조가 죽고 광해군이 즉위한 뒤 이이첨(李爾瞻) 등이 국권을 좌우하며 임해군(臨海君)을 해치려 하자 그 부당성을 상소했다. 탄핵을 받은 뒤 조정의 기강이 날로 어지러워지자 병을 이유로 사임을 청했으나 광해군은 이를 허락하지 않고 좌의정 이항복(李恒福)을 시켜 강제로 출사시켰다. 1614년(광해군 6) 영창대군(永昌大君)의 신원을 상소했다가 사형을 당하게 된 정온(鄭蘊)을 적극 변호하여 유배에 그치게 했다.

1616년 명나라에 다녀온 허균(許筠)이 중국 야사(野史)에 와전(訛傳)된 우리나라의 종계(宗系)를 시정했다고 보고하여 조정에서 그 축하연 개최 여부가 논의되었을 때 이를 반대하다가 축출되었고, 폐모론 등이 일어나자 둔지산(屯之山)에 들어가 은거했다. 저서로 〈일송집〉이 있다. 상주 봉암사(鳳巖祠)에 제향되었다. 시호는 문정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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