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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생 | 1890. 12. 18, 미국 뉴욕 시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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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망 | 1954. 1. 31(또는 2. 1), 뉴욕 시 |
국적 | 미국 |
요약 재생회로·슈퍼헤테로다인회로·주파수변조(FM) 시스템 등 오늘날의 라디오와 전자회로에 기초를 제공했으며, 그로 인해서 오늘날 FM의 넓은 주파수 대역 때문에 깨끗하고 수준 높은 방송이 탄생되었다. 14세에 최초의 대서양 횡단 무선통신에 성공한 굴리엘모 마르코니의 업적에 관하여 읽고 이에 자극을 받아 발명가가 되기로 결심했다. 그는 무선 전신에서 출발, 브라운관을 이용한 되먹임회로를 발명했으며, 제1차 세계대전중에는 파리에 있는 미국 육군신호부대 연구소로 자리를 옮겨서 고도로 선택적인 수신과 교환이 가능하고 매우 약한 고주파 전자기파를 크게 증폭하는 슈퍼헤테로다인회로를 발명했다. 1933년에는 주파수 변조를 통해 공전방해현상이 나타나지 않는 FM 원리를 발명했는데, 이는 이후 라디오와 TV 음성 채널에서 널리 사용되고 있다.
초기생애
맨해튼의 첼시 구역에 거주하는 독실한 장로교 집안에서 태어났다.
그의 아버지는 출판업자였으며 그의 어머니는 전직 교사였다. 어려서부터 엔진, 철도기관과 그밖의 모든 기계장치에 흥미를 느끼는 수줍음 많은 소년이었다. 14세에 최초의 대서양 횡단 무선통신에 성공한 굴리엘모 마르코니의 업적에 관하여 읽고 이에 자극을 받아 발명가가 되기로 결심했다. 집에 있는 다락방에서 매우 조잡한 무선장치를 만들었고 그 무렵에 교외로 옮겨가서 그의 인생을 다 바친 고독한 비밀 연구를 시작했다. 그는 아버지한테서 배운 테니스와 나중에 경주용 고속 자동차에 쏟았던 열정을 제외하고는 다른 것에는 취미가 없었다.
당시 무선통신은 조잡한 불꽃간극 송신기와 쇠가루 수신기 단계였고 희미한 모스 부호를 만들어냈기 때문에 성능이 좋은 이어폰으로나 간신히 들을 수 있었다. 그는 장치를 개량하기 시작했다. 고등학교를 졸업하고 아버지한테 졸업선물로 받은 빨간 오토바이를 타고 컬럼비아대학교 공학부에 통학하면서 연구를 계속했다. 대학 3학년 때 매우 독창성이 풍부한 첫번째 발명을 해냈다. 보다 나은 무선 수신기를 만들기 위해 연구한 장치 중에는 1906년 무선 전신 및 텔레비전(TV)의 발명에서 선구자였던 리 디 포리스트가 발명한, 그당시에는 이해하는 사람이 거의 없고 사용되지 않던 오디온이라는 세 부분으로 이루어진 진공관이 있었다.
그는 이 진공관이 어떻게 작동하고 어떻게 회로를 이루고 있는지 알아내기 위해, 철저하게 측정을 하여 재생회로 또는 되먹임회로라고 하는 회로를 고안해냈다. 이 회로가 1912년 가을 갑자기 1,000배로 증폭되었고 방끝에서도 들을 수 있을 만큼 큰 신호를 만들어냈다. 이로 인해 그는 또 하나의 발견을 했다.
그것은 진공관을 최대로 증폭할 경우 이 관의 역할이 수신기에서 발진기로, 즉 무선파형의 기본발생기로 바뀐다는 것이다. 이것은 지금도 전파 발생기로 아직도 모든 라디오·TV 방송에 사용된다. 그의 우선권은 나중에 디 포리스트의 도전을 받았으며 대법원에서도 2번이나 싸웠던 이 역사적 특허 분쟁은 14년 이상을 끌었다. 결국 이 소송은 발명의 본질에 대한 재판부의 오해로 인해 디 포리스트의 승소로 끝났다. 그러나 과학자들은 결코 이 판결을 받아들이지 않았다.
라디오 공학자협회는 되먹임회로를 발견한 공로로 앞서 수여했던 금메달을 철회하지 않았다. 그는 후에 미국 과학자의 최고의 영예인 프랭클린 메달을 받아 자신이 되먹임회로를 발명했음을 재입증했다. 전자공학의 시대를 연 이 초기의 발명은 그의 삶에 깊은 영향을 미쳤다. 잠시 컬럼비아대학교 강사로 근무한 후 제1차 세계대전중에는 파리에 있는 미국 육군신호부대 연구소로 자리를 옮겨서 고도로 선택적인 수신과 교환이 가능하고 매우 약한 고주파 전자기파를 크게 증폭하는 슈퍼헤테로다인회로를 발명했다(슈퍼헤테로다인 수신). 아직도 이 방식은 라디오·레이더·TV 수상기의 98%를 차지하고 있다.
그후 아메리카라디오방송회사(RCA)를 주도하게 되는 데이비드 사노프와 교제할 수 있었고 그의 비서와 결혼했다. 그 자신은 전쟁 후 컬럼비아대학교로 돌아와 유명한 물리학자, 발명가이며 스승이었던 마이클 푸핀의 조수가 되었다. 이 기간 동안 RCA를 비롯한 주요공사에 큰 금액을 받고 그의 회로특허권을 팔았다. 그후 1920년대에 라디오 붐이 일어 갑자기 백만장자가 되었으나, 여전히 컬럼비아대학교에서 강의했으며 푸핀 교수와 함께 일하면서 오랫동안 풀지 못한 문제인 라디오의 공전(空電)방해 현상을 제거하려는 연구의 재정을 담당했다.
FM 방송의 발명
1933년에 이 마지막 기본적인 문제를 풀 수 있는 진보된 4개의 회로에 대한 특허를 획득했다.
송신기에서 수신기에 이르기까지 전혀 새로운 라디오 시스템을 만들어냈다. 이전의 모든 라디오가 그러했듯이 음성이나 음악을 전달하기 위해 전파의 진폭이나 전력을 변화시키는 대신, 새로운 시스템은 넓은 주파수 범위에 걸쳐 파의 주파수(초당 파의 수)를 변조(變調)시켰다. 이렇게 만들어진 파는 공전방해현상(전기폭풍에 의해 생기는 진폭현상)이 발생하지 않았다. 그결과 FM의 넓은 주파수 대역 때문에 깨끗하고 수준 높은 방송이 탄생되었다.
그러나 새로운 시스템은 송수신기에 기본적인 변화가 필요했기 때문에 기존의 라디오 제조업자들은 이를 바로 수용하지는 않았다. 1939년 그는 가치를 증명하기 위해 자신이 30만 달러 이상의 경비를 부담하여 최초로 완전한 규모의 FM 방송국을 세웠다. 제2차 세계대전 동안 이 시스템을 개발하고 계속 개량하면서 (그가 다시 연구소로 돌아갔던 동안) 유지해야 했으며 전후에는 FM의 성장을 방해하려는 기도에 맞서야만 했다. FM이 서서히 기반을 잡았을 때 다시 그의 발명을 지키기 위한 지루한 특허 소송에 빠졌다. 1954년 FM을 위한 싸움에서 대부분의 돈을 날리고 병들고 늙어서 자살했다.
세월이 흘러 과학과 발명에서 그의 위치에 대한 인식이 날로 높아졌다. FM은 이제 라디오와 모든 TV 음성 채널에서 사용되며 이동통신, 극초단파 계전기, 우주-위성 통신에 널리 쓰인다. 그의 사후에 국제연합(UN)의 국제전기통신연합(International Telecommunications Union/ITU)은 그를 프랑스의 물리학자이자 수학자인 앙드레 마리 앙페르, 전화기를 발명한 알렉산더 그레이엄 벨, 영국 전기공학의 선구자 마이클 패러데이, 무선전신을 발명한 이탈리아의 굴리엘모 마르코니 등과 더불어 위대한 전기공학의 영웅으로 선정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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