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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약 의사이자 컴퓨터 바이러스 백신을 개발한 프로그래머 출신으로 19대 대선에서 국민의당 후보로 출마했으나 패배했다.
성장기
안철수는 1962년 경상남도 밀양군 밀양읍 내일리에서 아버지 안영모와 어머니 박귀남의 2남 1녀 중 장남으로 태어났다. 세 살 이후 부산 범천동으로 거주를 옮겨 유년기를 보냈고 부산동성국민학교·부산중앙중·부산고 등 부산에서 초중고를 모두 나왔다.
아버지 안영모는 안철수처럼 서울대를 졸업한 의사로 1963년 판자촌이었던 부산 범천동에서 병원을 개업해 50년 가까이 진료했다. 이화여대를 졸업한 어머니 박귀남은 안철수 등 자식들에게 항상 높임말을 쓴 것으로 유명하다.
어린 시절에는 학교 공부에 재미를 붙이지 못해 성적은 중간 수준이었다. 내성적인 성격으로 책을 좋아해서 학교도서관 책을 거의 다 읽을 정도의 독서광이었으며 과학기술에 관심이 많은 아이였다. 고등학교 2학년 때부터 성적이 수직으로 상승해 고등학교 3학년 때 이과 전체 1등을 했다.
1980년 '부모님을 기쁘게 해드리기 위해' 서울대 의대에 입학해 기초의학을 전공했다. 책 <행복바이러스 안철수>에서 그는 "피를 끔찍하게 싫어하던 내가 아버지가 좋아하실 거라는 이유 하나만으로 의과대학에 가기로 결정했다. 그런 용기가 어디서 났는지 알 수 없을 정도다"라고 했다.
안철수는 1982년 의대 재학 시절 본과 1학년을 마쳤을 때 학교에 적응하기 어려워 방황을 했다고 한다. 의대 본과 2학년 때 안철수는 서울 구로동에서 진료 봉사활동을 했다. 자서전 <안철수의 생각>에서 그는 "소설보다 잔인한 비극을 경험했다. 함께 살아가는 사회에서 각자 해야 하는 역할이 무엇인가에 대한 고민이 깊어졌다"고 밝혔다.
컴퓨터를 처음 접한 건 안철수가 방황 중이던 1982년 가을이었다. 1982년은 미국 시사주간지 <타임>이 컴퓨터를 '올해의 인물'로 선정한 해이기도 하다. 안철수는 이때 처음으로 같은 하숙집에 있던 사람이 가진 애플컴퓨터를 봤다. 그는 문화충격을 받고 컴퓨터 주인이 컴퓨터를 다루는 것을 자주 지켜봤다고 한다.
안철수연구소 설립
1986년 2월 서울대 의과대학을 졸업하고 같은 대학 대학원으로 진학해 1989년 9월까지 기초의학을 전공하며 조교로 근무했다. 안철수는 1986년 겨울방학 때 3개월간 모은 조교 월급에 빌린 돈을 보태 IBM 개인용 컴퓨터를 사고 IBM 기계어 공부에 몰입했다. IBM 기계어 공부를 끝낼 즈음인 1988년 플로피 디스크를 통해 감염되는 'C브레인 바이러스'가 한국에서 유행했다.
안철수는 컴퓨터 바이러스를 보도한 신문기사를 읽고 자신의 플로피 디스크 3장에도 이 바이러스가 감염된 것을 발견, 호기심에 바이러스 치료 방법을 연구했다. 그는 감염된 과정을 반대로 진행하면 바이러스를 치료할 수 있겠다고 생각하고, '백신'이란 이름의 안티바이러스 프로그램을 만들어 치료에 성공했다.
이 프로그램이 향후 V3의 최초 버전이 되는 V1이다. 안철수는 이 내용을 월간 <마이크로소프트웨어> 1988년 7월에 기고했다. 백신 발표에 대한 반응은 폭발적이었고, 안철수는 7년간 새벽 3~6시 사이에 백신을 만들고 낮에는 의학을 연구하는 이중생활을 했다. 제작한 백신은 무료로 배포했다.
대학을 졸업한 안철수는 1989년~1991년 단국대 의과대학에서 의과대학 최초로 의대생을 위한 컴퓨터 강좌인 '의학 컴퓨터'라는 과목을 개설해 강의했다. 1991년 안철수는 30세에 해군 군의관으로 입대했다. 입대 당일에도 미켈란젤로 바이러스의 원형인 스톤 바이러스의 치료법을 개발해 배포했다는 일화가 유명하다. 그는 3년여 간의 군의관 복무 시절에도 컴퓨터와 관련한 원고를 쓰고 백신을 만들었다.
1994년 4월 제대 후 백신 개발과 의학을 겸하기 어려운 시기가 왔다. 안철수는 1995년 아예 의사의 길을 포기하고 직원 2명과 벤처기업 '안철수 컴퓨터바이러스연구소(안랩)'을 설립했다. 경영은 쉽지 않았다. 처음 2년은 월급을 주기 힘들만큼 어려워 의사였던 부인의 월급으로 직원 월급을 준 일도 있었다고 한다.
안철수는 1995년 안철수연구소를 세우고 몇 개월 지나지 않아 9월부터 미국 펜실베이니아 공과대학과 와튼스쿨에서 기술 경영학 석사(Techno MBA) 과정을 밟았다. 회사 업무와 공부를 병행하다 1997년 8월 귀국 후 급성간염으로 몇 달 간 입원하기도 했다.
안철수는 자서전에서 1997년 미국 실리콘밸리의 거대 백신 소프트웨어 회사인 맥아피사로부터 "1,000만 달러에 안철수 연구소를 팔라"는 제안을 받았으나 그 자리에서 거절했다고 밝혔다. 이 이야기는 여러 교과서에 실리며 유명한 사례가 됐다. 같은 해 두 회사는 공동으로 상품을 개발해 판매하는 합작회사를 만들기로 계약을 맺었다가 해지했다.
1999년 4월 한국에서 수십만 대의 컴퓨터가 감염된 CIH바이러스(체르노빌 원자력 발전소 사고 발생일인 4월 6일에 작동하는 바이러스로 '체르노빌 바이러스'라고도 한다) 사태를 계기로 안철수연구소의 매출이 급성장하면서 경영 어려움에서 벗어났다. 당시 안철수는 일반 PC용 제품과 파일 서버 등을 포괄하는 토털 안티바이러스솔루션, 고객 지원 시스템 등을 마련해 놓았던 것이 시장 점유율을 높이는 계기가 됐다고 말했다.
이 해에 안철수연구소는 대한민국 소프트웨어 업체로는 두 번째로 연 매출 100억원을 돌파했으며 이후 세후 순익은 첫 번째로 100억 원을 돌파했다. 2000년 10월 13일 직원 125명에게 각각 650주씩, 자신의 지분에서 총 8만 주(전체 발행 주식 수의 1.5%)를 무상으로 나누어줬다. 2001년에는 안철수연구소가 코스닥에 상장했다.
안철수는 2001년
2005년 3월 안철수는 안철수연구소 대표이사직을 사임하고 이사회 이사장으로 부임했다. 2005년부터 2008년 4월까지 미국 스탠퍼드 대학교 벤처비즈니스 과정을 거쳐 펜실베이니아 대학교에서 와튼스쿨 경영학 석사학위(MBA)를 취득했다. 2008년 5월 카이스트 기술경영전문대학원 석좌교수에 취임해 기업가 정신을 강의했다.
안철수는 2009년 MBC 예능프로그램 <황금어장 무릎팍도사>에 출연해 대중적 인기를 얻었다. 같은 해 그는 청춘콘서트를 시작하고 2년 여 동안 전국 각지를 돌며 청춘 멘토로 활약했다. 2011년 6월 서울대학교 융합과학기술대학원장, 디지털정보융합학과 교수로 임용됐다.
가족
안철수는 1988년 서울대 의대 1년 후배인 김미경와 결혼했다. 안철수와 김미경은 의료봉사 활동을 같이 하던 게 인연이 됐다. 두 사람은 같은 대학, 대학원에서 석·박사 학위를 받았다. 김미경은 단국대와 성균관대에서 병리학 교수·전문의로 15년간 일하다 2002년 미국 유학을 떠나 변호사 자격증을 취득했다.
2008년 3월 26일 카이스트에 300억 원의 발전기금을 기부한 정문술 전 미래산업 회장이 석좌교수로 안철수를 추천하면서 안철수는 5월 1일 카이스트 석좌교수로 임용됐다. 김미경은 이보다 한 달 앞선 4월 1일 카이스트 의과학대학원 생명과학정책 분야 부교수(7호봉)로 임용되었으며 2009년 기술경영전문대학원으로 소속을 옮겼다. 이어 2011년 6월 안철수는 서울대 융합과학기술대학원장에, 8월 1일 김미경은 서울대 의과대 교수로 정년을 보장받으며 특별채용됐다. 두 사람 사이에는 외동딸 안설희 씨가 있다.
정치입문
2011년 9월 서울시장 보궐선거에서 안철수의 출마 여부에 관심이 집중됐다. 당시 대중 강연 '청춘콘서트'를 진행하며 인지도가 높아진 안철수는 9월 4일 서울시장 출마를 "진지하게 고민하겠다"라고 밝혀 출마 가능성을 내비쳤다. 주요 언론사 여론조사에서는 안철수의 지지율이 50%를 상회하는 압도적인 수치로 나타났다. 이에 '안철수 현상', '안철수 열풍'이라는 이름이 붙었다.
안철수는 9월 6일 당시 무소속으로 출마 의지를 밝힌 박원순과 만나 대화 후 서울시장 재보궐선거 불출마를 선언했다. 안철수는 이 자리에서 "아무런 조건도 없습니다. 제가 출마 안 하겠습니다. 방금 말씀하신 대로 꼭 시장이 되셔서 그 뜻 잘 펼치시기 바랍니다"라고 말했다. 안철수는 재보궐 투표 이틀 전인 10월 24일 박원순 후보의 선거캠프를 방문해 지지 의사를 공식적으로 밝혔다.
2011년 11월 14일 안철수는 사회 환원 차원에서 1,500억 원 규모의 안철수 연구소 개인 보유 지분 50%를 재단에 내놓겠다고 밝혔다. 2012년 2월 6일 안철수 재단을 설립했으며 2012년 2월 15일 안철수연구소는 안랩으로 사명을 변경했다.
그는 안철수 현상에 힘입어 2012년 9월 19일 대선 출마를 전격 선언했다. 안철수는 정당에 가입하지 않고 당 없는 캠프, 진심캠프를 꾸려 무소속 대통령 후보로 도전했다. 그러나 그가 출마를 선언한 직후부터 민주통합당 후보 문재인과의 단일화 압박이 있었다. 안철수와 문재인은 여론조사 문구와 방식 등 단일화 룰을 정하지 못했으며 갈등은 깊어졌다.
안철수는 대통령 후보 등록 개시 시점을 이틀 앞두고 "후보직을 내려놓겠다. 정치인이 국민 앞에 드린 약속을 지키는 것이 무엇보다 소중한 가치라고 생각한다"라며 사퇴했다. 안철수는 사퇴 2주 후부터 지원 유세에 나섰고, 대선 투표 당일 미국으로 가 2013년 3월 귀국했다. 같은 해 4월 진보정의당 공동대표 노회찬이 '삼성X파일' 떡값검사의 실명을 공개해 의원직을 잃은 서울 노원 병에서 무소속으로 출마해 60.46%의 지지율로 당선됐다. 민주당은 이 지역구에 후보를 내지 않았다
2013년 11월 안철수는 '국민과 함께 하는 새정치 추진위원회(새정추)'의 출범과 함께 신당 창당 작업을 공식화하고 이듬해 1월에는 3월 안으로 정식 정당을 만들겠다고 선언했다. 2014년 3월 민주당 김한길 대표와 제3지대 신당창당을 전격 선언하고 3월 26일 새정치민주연합을 창당해 공동대표에 취임했다. 2015년 7월 30일 15곳의 지역구 의원을 새로 뽑는 국회의원 재보선에서 새정치연합이 참패했다. 안철수와 김한길은 함께 퇴진했다. 이후 비대위 체제를 거쳐 문재인이 당 대표를 맡았다.
2015년 문재인과 안철수는 서로 한 치도 밀리지 않고 대립했다. 문재인은 문재인-안철수-박원순 체제로 지도부 구성을 제안했으나 안철수는 거부했다. 안철수는 역제안으로 '혁신 전당대회'를 제안했으나 문재인이 거부하자 결국 탈당을 결심했다. 문재인은 그의 탈당을 만류하기 위해 서울 상계동에 있는 안철수의 집 앞에서 기다리기도 했으나 안철수는 만나주지 않았다.
안철수는 2015년 12월 13일 일요일, “한 치 앞도 내다볼 수 없는 캄캄한 절벽 앞에서 저는 지금, 제가 선택할 수 있는 가장 어려운 길을 나서려고 한다”라는 탈당 선언문을 읽었다. 그는 2016년 2월 국민의당을 창당하고 2016년 총선에서 호남에서 완승을 거두었다.
19대 대선 출마
2017년 5월 열리는 대통령 선거에서 안철수는 국민의당 후보로 나섰다. 상대로는 더불어민주당 문재인, 정의당 심상정, 바른정당 유승민, 자유한국당 홍준표가 출마했다.
안철수는 2017년 국민의당 경선에서 전체 투표수 18만4768표 중 누적 득표율 72.71%(13만3927표)를 차지하며 대선 후보로 확정됐다. 국민의당 경선은 정당 사상 최초로 사전 선거인단 구성없이 신분증만 확인하면 누구나 경선투표에 참여할 수 있는 완전국민경선으로 시행됐다. 상대 후보로 나섰던 박주선은 7.91%(1만4561표), 손학규는 19.38%(3만5696표)를 차지했다.
안철수는 후보 수락 연설에서 "편 가르기를 끝장내야 미래로 갈 수 있다", "편 가르기 정권이 아니라 실력 위주의 드림팀을 만들겠다"라고 말했다. 그는 "평범한 국민의 힘을 한데 모아 비범한 대한민국을 만들겠다. 국민만 보고 가겠다"라며 "국민을 위한, 국민에 의한, 국민의 대통령이 되겠다. 오직 국민만 믿고, 안철수답게, 당당하게 승리하겠다"라고 강조했다.
안철수는 2017년 5월 9일 치러진 19대 대통령 선거에서 699만8335표(21.41%)를 득표해 더불어민주당 문재인, 자유한국당 홍준표에게 밀려 3위에 그쳤다. 안철수는 '정치 인생 모든 것을 걸겠다'라며 국회의원 사퇴서를 제출하고 선거 초반 문재인 후보와 접전을 펼쳤으나 TV 토론에서의 부진 등으로 막바지에 3위로 밀려났다.
안철수는 "국민의 선택을 겸허하게 받아들인다. 변화의 열망에 부응하기에는 많이 부족했다"라며 결과에 승복했다. 그는 "대한민국이 새로운 대통령과 함께 미래로 나아가기를 희망한다. 대한민국의 변화와 미래를 위해 더욱 노력하겠다"고 강조했다.
10대 공약
안보
안철수는 '튼튼한 자강 안보를 토대로 한반도 비핵화와 평화체제 구축'을 1순위 공약으로 제시했다. 안철수는 △해·공군 전력 확대 △전략무기 확충 △대북 미사일 방어체제인 킬체인과 한국형 미사일방어체계(KAMD) 조기 구축 등을 통해 국방력을 강화하고, 한미 동맹 강화와 동북아 평화체제의 병행 추진, 4자-6자회담 재개 등을 이행방법으로 제시했다. 이를 위한 재원은 5년간 약 10조 원으로 추산됐으며, 국방비를 국내총생산(GDP) 3%까지 점차 늘려나가는 방식으로 조달키로 했다.
좋은 성장 · 좋은 일자리
안철수는 2~4순위 공약으로 일자리, 성장 공약을 내세웠다. 먼저 교육부 폐지 및 학제개편 등을 주요 내용으로 하는 교육혁명, 과학기술·창업 혁명, 융합기술 생태계 구축 등으로 4차 산업혁명의 기반을 조성하겠다는 계획이다.
또 기업범죄의 형량 강화 및 비리 기업인에 대한 사면 제한, 재벌 총수 일가의 사익 편취 제한, 기업 지배구조 투명화 등으로 공정한 시장질서를 확립하고, 지속 가능한 경제 구조를 만들겠다고 밝혔다. 이에 더해 신용카드 수수료 인하를 인하하고 젠트리피케이션 각주1) 방지와 자영업자의 권익 보호 등 소상공인을 보호하겠다는 약속도 내놓았다.
안철수는 청년실업 해소를 위해 청년을 대상으로 5년 한시적인 청년고용보장 계획을 시행하겠다고 밝혔다. 중소기업에 취업한 청년들에게 2년 간 1,200만 원을 지원하고, 구직 청년들에게 6개월 간 180만 원의 훈련수당을 지급한다는 내용이다. 또 비정규직 남용을 막기 위해 공공부문 '직무형 정규직' 도입 후 민간 부분으로 확대하고, 비정규직을 남용하는 기업체에 대해 불이익을 부과하겠다고 밝혔다. 또 연간 1,800시간대의 근로시간 단축으로 일과 삶의 균형을 도모하겠다고 밝혔다.
정치개혁
안철수는 고위공직자 비리 근절을 위해 고위공직자비리수사처(공수처)를 설치하고, 검·경 수사권 조정을 통한 검찰 권한 통제와 대법원장 호선제, 대법관 임기연장 등도 추진키로 했다. 또 국회의원 국민소환제와 국민발안제, 국민공천제 등을 도입해 국회에 대한 국민의 상시적 통제를 강화하겠다고 밝혔다. 선거연령을 18세로 하향 조정하고 대통령선거 결선투표제를 도입하겠다는 약속과 개헌을 통해 청와대와 국회 모두 세종시로 이전하겠다는 약속도 담겼다.
복지
안철수는 복지 분야에선 △기초생활보장제도 부양의무자 기준 개선 △경력단절 전업주부의 연금보험료 소득·세액 공제 △배우자 30일 출산휴가 급여 지급제를 도입한다고 했다. 국공립 어린이집 확대와 공립 유치원 확충, 보육교사 근무여건 개선 등도 공약에 담겼다.
안전
안철수는 대규모 재난이 발생했을 때 범정부적 통합재난관리체계를 구축하고, 청와대가 재난 컨트롤타워 기능을 수행하겠다는 계획을 밝혔다. 또 재난 발생 시 간단명료하고 신속 대응이 가능한 지휘권 체계를 수립하고 소방본부의 119응급 구조 기능을 강화해 복합재난 대응 능력을 제고하겠다고 약속했다.
성평등
안철수는 △여성 폭력 피해자 지원 예산 확대 △ 성폭력 처벌 강화, 가정폭력 피해자 주거보장, 지속적 괴롭힘 범죄 처벌법 제정 등을 약속했다. 또 성별 임금격차 해소를 위해 '성평등임금공시제'를 도입하고, 육아휴직급여를 인상하며, 배우자 출산휴가 30일 보장 및 급여 도입으로 남성의 육아참여를 확대하겠다고 밝혔다.
환경
안철수는 미세먼지를 국가 재해재난에 포함시켜 국가 대응 매뉴얼을 마련하겠다고 밝혔다. 미세먼지 환경 기준을 선진국 수준으로 강화하고, 중국 등과 환경 외교를 강화하겠다고 밝혔다. 또 노후 석탄화력발전소를 폐쇄하는 등 석탄발전을 축소하고, 신재생에너지 비율을 확대하겠다고 약속했다. 이외에 어린이 등 취약 계층 및 다중 이용시설의 미세먼지 측정기 설치를 의무화했다.
농어촌
안철수는 △축산물, 농식품 먹거리의 안전·위생 질병을 일괄 관리하는 시스템을 구축해 국민의 먹거리 기본권을 보장하고 △ 쌀 등 주요 식량작물의 자급률을 향상하겠다고 밝혔다. 또 농식품부내 질병방역부서를 설치하고 백신은행을 설립해 전염병 발생시 신속 대응하겠다고 밝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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참고
- ・ 안철수의 생각, 안철수 지음, 김영사, 2011년
- ・ 안철수의 선택, 휴먼스토리, 미르북스, 2012년
- ・ 선거관리위원회, 안철수 후보 10대 공약, 2017년
- ・ 한겨레, 안철수 후보 영입 서울대, 연구실적 미흡한 부인도 두달뒤 채용, 2011년 4월 11일 http://www.hani.co.kr/arti/politics/assembly/790297.html
- ・ 시사저널, '강철수'로 거듭난 안철수 "내 길 간다!", 2017년 2월 21일
- ・ http://www.sisapress.com/journal/article/16504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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