백과사전 상세 본문

출처 다음백과

아일랜드 장로교회

다른 표기 언어 Presbyterian Church in Ireland

요약 1840년 분리교회와 얼스터 노회가 합하여 세운 교회.

1854년에는 먼스터 노회가 이 교회와 연합했다. 아일랜드 장로교회는 여기저기 흩어져 있던 청교도 집단들을 제외하면 1610년 제임스 1세의 얼스터 이주 정책으로 시작되었다. 그는 자신의 정책을 지지할 강력한 프로테스탄트 주민들을 아일랜드에 정착시키길 원했다. 그래서 아일랜드 사람들에게 속해 있던 땅을 스코틀랜드와 잉글랜드 정착민들에게 주었다. 수천 명의 스코틀랜드 주민들이 땅을 주겠다는 제의를 듣고 몰려왔지만 아일랜드 정착생활은 곤경에 처할 때가 많았다. 그들은 아일랜드 가톨릭교도들에게 미움을 샀으며, 그들에 대한 영국 정부의 정책은 일관성이 없었다.

처음에 아일랜드에 정착한 스코틀랜드 장로교도들은 아일랜드 국교회(성공회)의 일부로 간주되었지만, 찰스 1세(1625~49 재위) 때 정책이 바뀌자 그들은 할 수 없이 국교회에서 나와야 했고 결국 조직체를 따로 만들 수밖에 없었다. 1641년 아일랜드 가톨릭교도들이 영국 사람들에 대해 반란을 일으켜 아일랜드에 있는 수많은 프로테스탄트를 죽였다. 윌리엄 3세(1689~1702 재위) 때 영국 정부는 아일랜드 장로교도들에게 부분적으로 신앙의 자유를 허용했지만 1869년에 완전한 신앙의 자유가 허용되기까지 스코틀랜드계 아일랜드 사람들은 모진 상황을 견디지 못해 북아메리카로 이주했다.

스코틀랜드에서 장로교도 사이에서 벌어졌던 분열이 얼스터에서도 비슷하게 일어났다. 1741년 분리주의자들이 갈라져 1750년에 조직을 만들었고, 1752년에는 개혁장로교도들이 갈라져나가 1792년에 조직을 만들었다. 얼스터 노회는 장로교의 색채가 강했지만 더블린과 아일랜드의 남부 및 서부 장로교회들은 이 노회에 포함되지 않았기 때문에 따로 먼스터 노회를 구성했다. 개혁장로교회를 제외한 이들 집단은 모두 작은 교회로 존속하다가 결국 아일랜드 장로교회로 통합되었다.

18~19세기 아일랜드 장로교회들 사이에 심각한 교리 논쟁이 벌어져 한 세기에 한 집단씩 유니테리언주의자들이 되어 그 교회를 떠났다. 그 결과 아일랜드 장로교회는 매우 보수적인 신학을 유지하게 되었다. 그러나 20세기 중엽에 이르러서 아일랜드 장로교회는 그들의 엄격한 입장 가운데 일부를 재검토하고 있고, 국내외 문제에도 관심을 보이고 있다. 1921년 아일랜드가 북아일랜드와 아일랜드 공화국으로 나뉘었지만, 아일랜드 장로교회 신자들은 대부분 북아일랜드에 살고 있었기 때문에 큰 어려움을 겪지 않았다.

본 콘텐츠의 저작권은 저자 또는 제공처에 있으며, 이를 무단으로 이용하는 경우 저작권법에 따라 법적 책임을 질 수 있습니다.

출처

다음백과
다음백과 | cp명Daum 전체항목 도서 소개

다양한 분야의 전문 필진으로 구성. 시의성 이슈에 대한 쉽고 정확한 지식정보를 전달합니다.

TOP으로 이동
태그 더 보기
세계사

세계사와 같은 주제의 항목을 볼 수 있습니다.



[Daum백과] 아일랜드 장로교회다음백과, Daum
본 콘텐츠의 저작권은 저자 또는 제공처에 있으며, 이를 무단으로 이용하는 경우 저작권법에 따라 법적 책임을 질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