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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약
이슬람 국가들의 저명인사.
복수형은 a⁽yān.
이 말은 오스만 제국(1300경~1923)에서 처음에는 지방의 저명인사를 나타냈지만 18세기와 19세기초에는 정치적인 역할을 수행하고 공적인 지위를 차지한 지주계급에 적용되었다. 17세기 동안 많은 아인들은 징세권이 있는 농장에 대한 종신 차지권(借地權)을 얻어 재정적으로 번창했다. 러시아-투르크 전쟁(1768~74) 동안 오스만 정부는 군사와 재정 분야에서 아인의 원조를 구했으며, 그 대가로 그들을 국민이 선출한 대표로 공식 인정했다. 1786년 아인의 영향력이 커지는 것을 우려한 중앙정부가 지방정부에서 그들을 배제하려고 했지만 러시아와의 전쟁이 일어나자(1787) 한번 더 원조를 구함으로써 그들의 지방권력은 다시 회복되었다(1790).
셀림 3세(1789~1807 재위)와 마무드 2세(1808~39 재위)의 통치기간에 루멜리아(제국의 발칸 지역)의 아인들은 오스만의 국정에서 중요한 역할을 하여 때때로 중앙권력을 무시하기도 했다. 그중 잔니나(지금의 그리스에 있음)의 알리 파샤, 비딘(지금의 불가리아에 있음)의 파스바놀루 및 제레스(지금의 그리스 세라이)의 이스마일베이는 자신들의 사병과 징세권, 재판권을 보유했다. 루스추크(지금의 불가리아에 있음)의 '아인'인 바이락다르 무스타파 파샤는 셀림 3세를 왕위에 복귀시키는 데는 실패했지만 쿠데타를 성공시켜 셀림의 조카인 마무드 2세를 왕위에 앉혔다.
바이락다르는 그뒤 대(大)와지르(총리)가 되어 1808년 이스탄불에서 아인과 '데레베이'(derebey:아나톨리아의 세습적이고 거의 독립적인 제후인 '계곡의 영주')의 회의를 소집했으며, 거기에서 그들과 마무드 2세의 대리인들은 그들의 지위를 인정하고 공고히 하는 상호원조 협정에 서명했다. 그러나 그뒤 얼마 지나지 않아 마무드는 아인과 데레베이의 세력을 꺾는 데 성공함으로써 제국의 거의 전지역에 대한 지배를 확고히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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