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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약 고대 아테네의 3대 비극 작가 가운데 최초의 인물.
아테네의 대표적 극작 경연대회인 디오니소스 축제는 BC 501(또는 500)년에 개편된 것 같다.
그리고 그 직후에 아이스킬로스가 아마 처음으로 이 경쟁에 참여했다는 기록이 남아 있다. 그는 BC 484년 봄에 연극 부문에서 처음으로 우승했다(우승작의 제목은 알려져 있지 않음). 한편 그는 아테네를 위한 전투에도 참여했다. 전해 오는 말에 따르면, 그는 BC 490년에 마라톤 전투에서 부상하여 전쟁터 밖으로 실려나왔다고 한다. 그가 이 전투에 참여한 사실은 나중에 그의 묘비명에도 언급되었다. BC 480년에 페르시아인들은 그리스를 재침략했고, 아이스킬로스는 또다시 전투에 참여하여 아르테미시움(그리스 동해안 앞바다에 있는 에우보이아 섬의 북쪽 끝)과 살라미스(아테네 근처)에서 싸웠다.
그가 살라미스 해전에서 맡은 역할은 시인인 이온이 증명하고 있다. 따라서 아이스킬로스는 그리스가 패망에 얼마나 가까이 갔는가, 그리스가 패망에서 구출된 것은 얼마나 기적적이었는가, 그리스는 테미스토클레스(정치가 겸 장군)의 통찰력과 계획에 얼마나 많은 빚을 지고 있는가를 직접 목격했다. 이런 인상들은 그의 상상 속에 뿌리를 내려, 오늘날까지 남아 있는 그의 작품 가운데 가장 오래된 희곡 〈페르시아 사람들 Persians〉에서 꽃을 피웠다.
이 작품은 BC 472년 봄에 열린 경연대회에서 우승을 차지했다. 이 작품에는 적군의 맹렬한 공격과 그것을 물리치는 그리스군의 활약이 처음부터 끝까지 웅장하게 펼쳐져 있다. 페르시아 왕의 야욕은 민주적으로 다스려지는 아테네인들의 힘, 통찰력있는 지도자의 명령에 정확하고 힘찬 반응을 보이는 아테네인들의 힘에 밀려 좌절되었다.
아이스킬로스는 시칠리아 참주 히에론 1세의 요청에 따라 시라쿠사(시칠리아 섬에 있는 도시)에서 〈페르시아 사람들〉을 재상연했다.
그는 이때이거나 이보다 몇 년 전(이때일 가능성이 더 많아 보임)에 시라쿠사에서 〈에트나의 여인들〉이라는 야외극을 무대에 올린 적도 있었다. 그의 생애에 관한 옛 전승에는 그의 시칠리아 방문에 대한 이야기가 많이 포함되어 있는데, 이 이야기들은 제법 자세하지만 앞뒤가 안 맞는 경우가 많다. 어떤 이야기에 따르면, 그는 마라톤 전투의 영웅들을 기념하는 경연대회에서 승전가와 기념헌정사를 전문으로 쓰는 유명한 작가 시모니데스에게 지자 자존심이 상해서 홧김에 시칠리아 섬으로 갔다고도 하고, 그의 연극이 상연되는 도중에 극장 좌석이 무너지자 동포들의 미신적인 분노를 피해 시칠리아 섬으로 건너갔다고도 한다.
그러나 이 2가지 이야기가 모두 사실인 것 같지는 않다. 첫번째 이야기는 아이스킬로스가 마라톤 전투에 대한 비가체 시를 썼다는 사실을 보다 흥미진진하게 꾸민 것에 불과한 듯하다. 그리고 2번째 이야기도 신빙성이 없는데, 이는 동시대 극작가인 프라티나스에 대해서도 똑같은 이야기가 전해내려오기 때문이다.
그러나 아이스킬로스가 히에론 1세의 궁정에 간 것은 중대한 문제를 제기한다. 즉 〈묶인 프로메테우스 Prometheus desmotes〉에서 그토록 참주를 혐오한 시인이 어떻게 〈에트나의 여인들〉(이 작품은 참주 히에론이 새 도시 에트나를 세운 데 대해 경의를 표하고 있음)을 쓸 수 있었는가 하는 문제이다. 이에 대한 대답은 그가 택한 말투에서 찾을 수 있다. 오늘날 많은 사람들이 믿고 있는 바와 같이, 1952년에 발표된 파피루스 조각이 정말로 아이스킬로스의 소실된 야외극의 한 단락이라면, 여기에서 '정의'라는 인물이 갖는 중요성은 의미심장할 수 있다.
아이스킬로스의 말을 그대로 인용하면 "정의는 제우스의 옥좌 옆에 앉아서……정의로운 사람들의 정의로운 생활에 경의를 표한다." 이것은 찬양보다는 오히려 경고이며, 극작가는 히에론에게 이런 정의를 이상으로 삼으라고 촉구하고 있는 것이다. 시라쿠사에서 〈페르시아 사람들〉을 상연한 것도 이같은 관점에서 해석할 수 있다. 참주 히에론의 형이자 전임자인 겔론은 살라미스 해전이 벌어지기 전에 그리스의 원조 요청을 거부했지만, 페르시아군이 그리스를 침략한 것과 때를 같이하여 에게 해로 진출한 북아프리카의 도시 카르타고의 침략군을 물리쳤고, 히에론 자신은 BC 474년에 이탈리아 키메에서 에트루리아인들을 격퇴했다.
경쟁과 증오심은 이제 가라앉혀야 하며, 동쪽과 서쪽의 이방인 침략자들을 물리친 지금 그리스는 자유와 정의의 깃발 아래 단결해야 한다고 아이스킬로스는 말하고 있는지도 모른다.
문헌들은 아이스킬로스가 다른 많은 작가들과 교분을 맺었음을 입증해준다. 그들 가운데 몇 명은 히에론의 궁정에서도 만났을 것이다(아마 거기서 처음 만나지는 않았을 것으로 보임). 비잔틴 학자 에우스타티우스는 아이스킬로스와 서정시인 핀다로스의 관계를 기록하고 있다.
핀다로스는 아이스킬로스보다 7세 아래였고, 젊은시절에 아테네에서 공부하면서 BC 497(또는 496)년에 열린 주신찬가(합창용 송가의 유형) 경연대회에서 우승을 차지했다. 두 시인은 주제와 그 주제를 다루는 법(예를 들면 에트나 화산의 분화를 생생하게 의인화하고 유별난 은유를 즐기는 취향)에서 상당한 유사성을 보여준다. 나중에 핀다로스는 아이스킬로스에게서 '허풍'을 배웠다는 평가를 받았다. 그러나 도시 중심적이고 민주적인 아이스킬로스의 인간관은 운동 경기에서 부각되는 남자다움(초국가적이며 궁극적으로 뿌리가 없는 미덕)을 찬양한 핀다로스의 인간관과는 거리가 먼 세계이다.
아이스킬로스가 많은 작품을 쓴 다재다능한 서정시인 시모니데스에게 졌다는 근거 없는 이야기를 제외하면, 두 사람의 관계를 입증하는 직접적인 증거는 전혀 없다. 그러나 그들은 테미스토클레스를 중심으로 한 단체에서 만났을 가능성이 크다. 둘 다 이 장군의 매력에 얼마나 깊이 사로잡혔는가를 나름대로의 방식으로 표현했기 때문이다. 또한 시모니데스는 히에론의 궁정에 자주 드나드는 단골손님으로 언급되어 있는 것으로 보아 두 사람은 그곳에서 다시 사귀기 시작했을지도 모른다.
아이스킬로스가 특히 〈페르시아 사람들〉에서 그보다 나이가 많은 비극 작가 프리니코스의 기법을 이어받았듯이, 아테네의 위대한 비극 작가 소포클레스는 아이스킬로스의 영향을 받았다. 소포클레스 자신도 나중에 자신의 초기 표현양식이 아이스킬로스에게서 받은 '영향' 가운데 하나라고 인정했다(두 사람이 아테네에서 경쟁한 10여 년 동안에는 아이스킬로스도 소포클레스의 영향을 받은 듯한데, 왜냐하면 많은 비평가들이 아이스킬로스의 마지막 희곡으로 여기는 〈묶인 프로메테우스〉가 소포클레스의 표현양식에 담겨 있는 독특한 버릇을 놀랄 만큼 많이 보여주기 때문임). 아이스킬로스가 그리스의 키오스 섬 출신으로 아테네에 막 도착한 젊은 시인 이온을 처음 만난 것은 BC 460년대일 것이다.
아이스킬로스의 말년은 극적인 성공(그리고 풋내기 소포클레스에게 당한 1번의 놀라운 패배)의 기록이다.
BC 468년의 디오니소스 축제에 처음 출전한 소포클레스의 처녀작은 선배 시인 아이스킬로스의 출품작을 물리치고 우승했다. 그러나 이 승리를 둘러싼 상황은 수상쩍었다. 그리스의 전기 작가이자 역사가인 플루타르코스(AD 46경~119경)는 여느 때의 심사 절차가 보류되었으며, 보수 정치가 키몬이 이끄는 장군 위원회가 극작 경연대회 우승자를 결정하는 영예를 얻었다고 기록하고 있다. 따라서 정치적 고려가 심사에 참가한 장군들의 비판능력을 혼란시켰고, 테미스토클레스와 경쟁 관계에 있던 키몬이 아이스킬로스(4년 전에 〈페르시아 사람들〉에서 테미스토클레스를 지지한 바 있음)보다는 소포클레스에게 낙점을 주었을 것이라는 결론을 피하기 힘들다.
그래서 어떤 전설은 아이스킬로스가 여기에 분개한 나머지 다시 시칠리아 섬으로 가버렸다고 말하고 있는데, 이 전설에는 신빙성이 없다. 아이스킬로스는 BC 467년 오이디푸스 3부작으로 우승하여 1년 전의 패배를 설욕했기 때문이다. 이 3부작 가운데 지금까지 남아 있는 것은 종막을 이루는 〈테베를 공격하는 7장군 Hepta epi Thebas〉뿐이다.
수사학교수 고르기아스가 말했듯이 '아레스(그리스의 전쟁의 신)로 가득 찬 희곡'이며, 아르고스(남부 그리스에 있는 스파르타의 경쟁도시) 침략군에게 공격받고 있는 테베(아테네에서 북서쪽으로 약 72㎞ 떨어진 도시)의 모습을 생생히 묘사한 이 작품은 BC 480년에 아테네를 위협한 페르시아군에 대한 기억의 영향을 받고 있었을 것이다. 이 희곡의 주인공 에테오클레스는 자신의 견해에 따라 그의 도시를 지키려고 애쓰지만 형 폴리네이케스를 죽이려 하게 되고, 오이디푸스 가문에 내려진 피의 저주 때문에 도리어 형에게 살해된다.
다나오스 3부작(다나오스는 아이스킬로스가 극화한 전설의 주인공 이름임)도 BC 460년대의 작품이다. 이 3부작 가운데 지금까지 남아 있는 것은 서막을 이루는 〈구원을 요청하는 여인들 Hiketides〉뿐이다. 이 희곡은 난민들로부터 보호와 피난처를 요구받은 지도자의 진퇴양난을 묘사하고 있다. 그들의 요청을 받아들이면, 그는 자신의 백성을 피비린내 나는 전쟁으로 끌어들이게 될 것이다. 신화 속의 펠라스고스가 느낀 고뇌는 BC 499년에 이오니아 혁명가들로부터 도움을 요청받았을 때나, 좀더 가깝게는 추방당한 테미스토클레스를 받아들여 피난처를 제공했던 아르고스인들이 접근해왔을 때 아테네가 느낀 고뇌와 비슷하다.
아이스킬로스가 이 격정적인 작품을 쓸 때, 그의 마음은 이 2가지 유사한 고뇌를 모두 절실히 느끼고 있었을 것이다. BC 462년에 아테네 헌법이 급진적으로 개정되었고, 보수적인 키몬은 정적의 공격을 받아 실제로 피를 흘리면서 추방되었다. BC 458년에 아이스킬로스가 쓴 오레스테스 3부작은 시민이 같은 시민에 대항하여 무기를 든 이런 분위기를 반영하고 있다. 시인은 이것을 '부족전쟁'이라고 표현했다.
그러나 아이스킬로스의 작품은 불화가 화합에 굴복하고, 유혈은 평화에, 그리고 혁명은 법의 지배에 굴복하는 것으로 결말을 맺는다. 복수의 여신들 같은 옛날의 신들은 아테네 시에서는 변형되어 새로운 건설적 기능을 맡는다. 그리하여 복수의 여신들은 아테네의 에우메니데스(은혜의 여신들)가 된다.
〈오레스테이아〉 이후 아이스킬로스는 마지막으로 시칠리아 섬에 갔다.
아리스토파네스는 〈개구리들〉에서 익살스러운 아이스킬로스로 하여금 "나는 아테네인들과는 마음이 맞지 않는다"고 말하게 하지만, 이 말을 전적으로 진지하게 받아들일 필요는 없다. 후에 생겨난 흥미본위의 전설에 의하면, 아이스킬로스는 엘레우시스에서 열린 밀교 의식의 내용을 폭로했다는 이유로 아레오파고스(아테네 법관 회의)에서 정식 재판(아이스킬로스 자신이 〈에우메니데스 Eumenides〉에서 오레스테스를 위해 고안한 재판과 아주 비슷한 재판)을 받았다고 하는데, 이 모든 것은 순전한 허구인 것 같다.
연대기 작가들은 아이스킬로스가 BC 456(또는455)년에 69세의 나이로 젤라(시칠리아 섬 남해안에 있는 도시)에서 죽었다고 기록하고 있다. 독수리가 그의 대머리 위에 거북을 떨어뜨리는 바람에 죽었다는 우스갯소리는 후세의 희극 작가가 지어낸 허구일 것이다. 그는 젤라에서 '영웅적인' 대접을 받았다. 공개 장례식에서는 제물이 바쳐졌고 그의 무덤에서는 연극이 공연되었으며, 그후 그의 무덤은 작가들의 순례지가 되었다. 후세의 시라쿠사 참주인 디오니시오스 1세는 갖은 애를 써서 아이스킬로스의 책상을 손에 넣은 뒤, 이 책상을 성스러운 유물로 받들었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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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aum백과] 아이스킬로스의 극작가 생활 – 다음백과, Dau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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