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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생 | 614, 아라비아 메카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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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망 | 678. 7, 메디나 |
국적 | 마호메트 |
요약
예언자 마호메트(이슬람교의 창시자)가 가장 총애하던 그의 3번째 부인.
정식 이름은 ⁽ Ā⁾ishah Bint Abī Bakr.
마호메트가 죽은 뒤 정치적으로 매우 중요한 역할을 했다. 마호메트의 결혼은 모두 정치적인 동기가 있었다. 이 경우에도 아이샤의 아버지이며 마호메트의 가장 중요한 지지자 중의 한 사람이었던 아부 바크르와의 관계를 돈독히 하기 위한 것으로 보인다.
아이샤는 매력이 있었고 부부관계는 순수하고 따뜻했으므로, 후에 계속된 마호메트의 결혼에도 불구하고 둘 사이의 애정은 변하지 않았다. 전해오는 이야기로는 627년 아이샤가 마호메트를 따라 원정을 나섰다가 일행에서 떨어지게 되었는데, 후에 사막에서 그녀를 발견한 남자의 호위를 받아 메디나로 돌아왔을 때 마호메트의 적들은 그녀가 부정한 짓을 저질렀다고 주장했다. 그러나 마호메트는 그녀의 결백을 단언하는 계시를 받고 그녀를 비난하던 자들에게 공개적으로 모욕을 주었다고 한다. 마호메트가 살아 있는 동안 아이샤는 그의 정치와 종교 정책에 커다란 영향을 주지는 않았다.
632년 마호메트가 죽자 아이샤는 자식도 없는 18세의 미망인이 되었다. 그녀는 우스만(644~656 재위, 3대 칼리프, 이슬람 공동체의 직함뿐인 지도자) 시대가 될 때까지는 정치적인 활동을 하지 않았다. 우스만이 재위했을 때 아이샤는 656년 우스만 살해의 원인이 된 반대파를 조장하는 데 중요한 역할을 했다. 그후 아이샤는 우스만의 후계자인 알리에 대항해 군대를 일으켰지만 낙타 전투에서 패했다. 아이샤가 타고 있던 낙타 주변에서 일어난 격렬한 싸움에서 이 싸움의 이름이 유래했다. 아이샤는 생포되었으나 메디나에서 조용히 살라는 허락을 받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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