백과사전 상세 본문
출생 | 미상 |
---|---|
사망 | 미상 |
국적 | 이집트 |
요약
BC 14세기에 활동한 이집트의 왕(BC 1323~1319 재위).
Kheperkheprure Ay라고도 함.
관리와 군인으로 일하다 제18왕조의 마지막 왕인 투탕카멘 왕이 죽은 뒤 왕위에 올랐다. 아이는 아멘호테프 3세의 왕비였던 티이와 남매간이라는 신분에다가 아크나톤 왕의 왕비 네페르티티의 유모였던 아내의 도움을 얻어 출세했다. '신의 아버지'라는 칭호로도 잘 알 수 있듯이 아크나톤 왕의 궁정 관리로 일하며 왕가와 매우 친밀한 관계를 유지했으며 네페르티티의 아버지라는 설도 있다.
그는 군대에서도 중요한 직책을 맡았으며 왕의 비서로도 일했다. 아크나톤이 죽은 뒤 그를 계승한 투탕카멘 왕의 가장 가까운 조언자가 되면서 아이의 위세와 영향력은 커졌다. 그는 아크나톤 왕으로부터 박해를 받았던 아몬신의 제사장들과 투탕카멘이 서로 화해하도록 이끌었다. 투탕카멘 밑에서 일하는 동안 또다른 군대 요직을 차지하는 한편, 종교 업무를 처리하는 고위직을 비롯해 총리의 지위에도 올랐다. 그는 자신을 그같이 높은 지위에 앉힌 왕가에 계속해서 충성을 다했다.
그가 투탕카멘 왕과 공동통치했다는 명백한 증거는 없으나 투탕카멘이 젊은 나이에 예기치 않게 죽은 직후 계승자로서 왕의 장례식을 주관했다. 투탕카멘의 왕비인 앙케세나멘은 아나톨리아에 있는 히타이트 왕국의 왕자와 결혼한 뒤 왕자를 왕으로 옹립하려는 음모를 꾸몄다. 이같은 일을 그녀가 혼자서 했는지 주위의 조언을 받아 했는지는 알려져 있지 않지만 히타이트의 왕자는 붙잡혀 피살당했다.
1932년 아이와 앙케세나멘의 이름이 박힌 반지가 카이로에서 발견되었는데, 그것은 그가 앙케세나멘과 결혼해 왕이 되었다는 사실을 암시하는 것으로 해석된다. 그러나 아이의 본부인은 여전히 정비로 있었으며 이 사실은 그의 무덤에 잘 나타나 있다. 아이는 테베에 아주 훌륭한 장례용 신전을 지었다. 여기에 사용된 혁신적인 방식은 후대에 가서 하나의 정형이 되었다. 그는 투탕카멘처럼 아텐 신에 대한 숭배를 계속했으며 노년에 왕위에 올라 겨우 4년밖에는 통치하지 못했다. 아들이 없었으므로 장군인 호렘헤브가 그를 계승했다.
본 콘텐츠의 저작권은 저자 또는 제공처에 있으며, 이를 무단으로 이용하는 경우 저작권법에 따라 법적 책임을 질 수 있습니다.
왕과 같은 주제의 항목을 볼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