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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생 | 1895. 2. 22, 페루 트루히요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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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망 | 1979. 8. 2, 리마 |
국적 | 페루 |
요약 페루의 정치학자·정치가.
1924년 이후 페루의 급진적 분열의 동인이었던 아프리스타당(Aprista Party)을 창설하고 이끌었다.
부유한 가정에서 태어난 아야 데 라 토레는 24세의 나이에 산 마르코스 학생연맹의 의장에 선출되었고, 민중대학으로 알려진 노동자를 위한 야간학교를 세우기 위해 학생들을 이끌었다. 좌익 성향의 강연이나 저술에도 불구하고 그는 아우구스토 레기아의 독재정권과의 충돌을 피했으나 예수 성심(聖心) 축일에 페루를 헌납하는데 반대하여 1923년 5월 23일 대중시위를 주도했다. 이로 인해 그는 1923년 10월 9일 추방되었다.
멕시코 시에서 망명생활을 하면서 아프리스타 운동을 결성했다(1924. 5. 7). 레기아 정권이 무너지자 1931년 페루에 돌아와 아프리스타당 대통령 후보로 출마했다. 페루의 과두정부는 루이스 M. 산체스 케로 대령을 지지했고, 치열한 선거가 치러진 후 산체스 케로가 대통령에 취임했으며, 그는 산체스 케로가 1933년 암살될 때까지 감옥에 갇혀 있었다.
1934~45년에 페루에서 은신생활을 했으나 지하활동과 저술을 통하여 널리 알려졌다. 1945년 아프리스타당은 인민당이라는 당명으로 호세 루이스 부스타만테 이 리베로를 지지해 대통령에 당선시켰으나 실질적으로는 당시 50세였던 그가 정부를 장악하고 있었다. 그러나 의회 내 그의 지지자들은 사회 정치적 개혁안들을 통과시키는 데 실패했다.
1947년 부스타만테 이 리베로는 인민당 후 불법화했다. 마누엘 오드리아 장군이 부스타만테 이 리베로 정부를 전복한(1948) 후, 1949~54년에 리마에 있는 콜롬비아 대사관에서 망명해 있던 그는 멕시코로 건너갔다. 오드리아의 실각 이후 합헌 정부가 들어서자 1957년 멕시코에서 귀국했다. 1962년 대통령 선거에서 그는 아프리스타당 후보로 출마했다. 경쟁 후보는 오드리아와 페르난도 벨라운데 테리였다. 치열하고 격렬한 선거를 마쳤을 때 아야 데 라 토레는 당선에 필요한 전체투표자의 1/3의 지지를 얻는 데 근소한 차이로 실패했고, 경선은 다시 의회에서 치러지게 되었는데, 의회 내에서 아프리스타당이 다수당은 아니었지만 제1당이었다. 그러나 군은 그의 승리를 저지하도록 결정되어 정부를 장악하고 6월의 선거를 무효화했으며, 1963년 중반에 다시 선거를 치를 것을 약속했다. 6월에 약속된 선거가 실시되어 벨라운데 테리는 대통령에 당선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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