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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생 | 1935, 팔레스타인 제파트(현재는 이스라엘 영토)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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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약 팔레스타인 정치가.
Abu Mazen이라고도 함. 2003년에 잠시 팔레스타인 자치정부 수상을 지냈으며, 야시르 아라파트가 사망한 후 2005년에 팔레스타인 정부의 수반으로 선출되었다. 아랍-유대인 촌인 제파트에서 태어난 아바스는 1948년의 아랍-이스라엘 전쟁기간 중 가족들과 함께 시리아로 도피했다.
난민 신분이었음에도 불구하고 그는 다마스쿠스대학교에서 법학 학위를 취득했다. 1950년대 말 그는 파타(Fatah)의 창립자 중 한 사람이 되었는데, 파타는 훗날 팔레스타인 무장 투쟁을 주도하며 팔레스타인 해방기구(Palestine Liberation Organization/PLO)를 지배하게 된다. 1970년대 말 PLO의 국제부 책임자로 일하면서 아바스는 이스라엘 평화단체들과의 관계 형성에 크게 기여했다.
1982년에는 모스크바대학교에서 역사학으로 박사학위를 취득했는데, 그의 학위논문은 나치즘과 시오니즘에 대한 연구로, 훗날 유대인 단체들은 이 논문이 홀로코스트를 부정하는 연구였다고 비난했다. 그는 1990년대에는 이와 관련된 첨예한 논쟁과 거리를 두려고 노력했다.
1990년대 초 아바스는 마드리드 평화회담(1991), 그리고 노르웨이에서 이스라엘과 가진 여러 차례 비밀회의를 통해 팔레스타인 협상전략을 마련했다. 오슬로 협약(1993)을 통해 이스라엘과 팔레스타인은 상대방에 대한 인정의 폭을 넓히고, 이스라엘은 웨스트뱅크와 가자 지구 통치권을 팔레스타인 자치정부에게 양도하게 되었다.
2000년 7월 아바스는 캠프 데이비드 평화회담에 팔레스타인 대표로 참석하여 이스라엘의 평화제안을 강력하게 거부했다. 그러나 회담 이후에 전개된, 인티파다(intifadah, 아랍어로 "흔들어 없애다."라는 뜻)라 불리는 팔레스타인 폭력 봉기에 대해서도 역시 반대했다.
2003년 국제적 압력이 거세짐에 따라 아바스는 아라파트를 제어하기 위한 목적 차원에서 팔레스타인 수상에 임명되었다. 미국과 이스라엘은 아라파트를 평화의 장애물로 간주하고 있었던 것이다. 취임 직후 그는 테러리즘과의 절연을 선포하고, 이스라엘에 대한 인티파다의 종식을 요청했으며, 팔레스타인 단일군대 창설을 결정했다. 그러나 얼마 되지 않아 그는 이스라엘, 미국, 아라파트 등이 자신의 입지를 위태롭게 해왔다고 주장하며 수상직을 사임했다.
2004년 11월 아라파트가 사망한 뒤 아바스는 PLO 의장에 추대되었고, 2005년 1월 선거에서 60퍼센트 이상의 지지를 얻어 아라파트의 뒤를 이어 팔레스타인 자치정부 수반으로 선출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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