백과사전 상세 본문
출생 | 1757. 3. 31, 스웨덴 왕국령 핀란드 투르쿠 근처 산모르텐스 |
---|---|
사망 | 1814. 8. 19, 러시아 상트페테르부르크 근처 차르스코예셀로 |
국적 | 스웨덴 |
요약 스웨덴의 정치가.
외교·군사 문제에서 크게 활약했다. 1781년 스웨덴의 구스타프 3세를 모시는 시종으로 임명되어 궁정에서 화려한 경력을 쌓았다. 구스타프 3세는 러시아의 예카테리나 2세와 협상할 대표로 그를 선정했고(1783), 덴마크 정부와 협상할 때도 그를 기용했다(1787). 1788~90년 러시아와의 전쟁에서는 왕이 가장 신임하는 조언자로서 가장 적극적으로 활동했다.
1788년에 덴마크가 스웨덴을 침공하여 예테보리를 위협하자, 왕명으로 달라르나 부대를 조직했다. 거의 모든 귀족이 왕을 버렸을 때도 충성스러운 신하로 남아 있었으며 러시아와의 전쟁 후반에 눈부신 활약을 보였고, 베렐레 평화조약(1790)에서는 스웨덴 전권 대사였다. 구스타프 3세의 재위 말년에 부르봉 왕조를 고집스럽게 지지하는 왕에 대해 이의를 제기했지만, 그의 영향력은 누구보다도 강력했다.
1792년 구스타프 3세는 임종하면서 아들을 그에게 맡기고, 그를 섭정위원회 위원으로 임명했다. 그러나 섭정인 카를 공작(나중에 카를 13세)은 그를 내쫓기 위하여 나폴리 주재 스웨덴 대사로 내보냈다. 그는 나폴리에서 러시아의 예카테리나 2세에게 편지를 보내 구스타프 왕가를 위해 무력 시위를 벌이라고 종용했다. 이 은밀한 계획이 섭정의 밀정들에 의해 탄로나자, 나폴리 여왕인 카롤리나의 도움으로 도망쳤다가(1794) 후에 다시 러시아로 달아났다.
구스타프 4세 아돌프가 성년이 되자, 복권되어 1802년 빈 주재 스웨덴 대사로 임명되었지만, 나폴레옹 보나파르트에 대한 오스트리아 정부의 태도를 비난했기 때문에 2년 뒤 대사직에서 물러나야 했다. 1805~07년 포메라니아 주둔 스웨덴군 총사령관으로 있으면서 프랑스군의 점령을 저지했다. 구스타프 4세 아돌프가 폐위된 뒤(1809), 왕세자인 구스타프를 가장 용감하게 지지했다. 1811년 스웨덴에서 추방당해 러시아에 피신했고 그곳에서 알렉산드르 1세에게 큰 영향력을 행사했다.
핀란드 대공국을 자치국가로 승격시키는 데 누구보다도 크게 이바지했고 나폴레옹에 대한 러시아의 방어 계획을 세우는 일에 참여했으며, 알렉산드르 1세와 스웨덴 왕세자인 베르나도트(후에 카를 14세 요한)가 1812년 8월 투르쿠에서 가진 회담에도 참석했다.
본 콘텐츠의 저작권은 저자 또는 제공처에 있으며, 이를 무단으로 이용하는 경우 저작권법에 따라 법적 책임을 질 수 있습니다.
정치가와 같은 주제의 항목을 볼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