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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생 | 1769. 12. 26, 스웨덴 뤼겐 쇼리츠바이가르츠(지금의 독일)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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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망 | 1860. 1. 29, 독일 본 |
국적 | 독일 |
요약 독일의 산문작가·시인·애국자.
나폴레옹 시대에 독일인들의 민족적 자각을 표현했다.
슈트랄준트·그라이프스발트·예나 등지에서 교육받고 루터파 목사의 자격을 얻었다.
그러나 28세에 성직을 버리고 18개월간 유럽을 여행했으며 독일로 돌아오는 길에 라인 강 둑을 따라 폐허가 된 성들이 늘어선 모습을 보고 그것들을 파괴한 프랑스인들에 대해 반감을 갖게 되었다.
이 여행에서 얻은 느낌들을 〈1798~99년 독일·헝가리·이탈리아·프랑스를 돌아보고 Reisen durch einen Teil Deutschlands, Ungarns, Italiens, und Frankreichs in den Jahren 1798~99〉(6권, 1801~03)라는 책에 표현했다.
1800년 그라이프스발트에 정착해 조교수의 자격으로 역사를 강의했다. 1803년 프랑스의 침공에 대한 견해를 밝힌 〈게르마니아와 유럽 Germanien und Europa〉을 발표했다. 그뒤에 나온 〈포메른과 뤼겐 농노제도의 역사 시론 Versuch einer Geschichte der Leibeigenschaft in Pommern und Rügen〉(1803)은 제목에서도 알 수 있듯이 포메른과 뤼겐 농노제의 역사를 다룬 것으로, 스웨덴의 국왕 구스타프 4세는 3년 후 이 농노제를 철폐했다.
1806년 아른트는 그라이프스발트대학의 역사교수로 임명되었으며 〈시대의 정신 Geist der Zeit〉(1808) 제1부를 출판했다. 이 책을 통해 그의 국민들이 프랑스의 멍에를 벗어던질 것을 호소했다. 나폴레옹의 보복을 피해 스웨덴으로 망명한 그는 계속해서 자신의 애국주의적인 견해를 소책자·시·노래 등에 담아 그의 조국인들에게 전했다.
1809년 독일로 돌아왔으며 1812년 상트페테르부르크로 불려가 프랑스에 대한 마지막 투쟁 준비를 도왔다.
그러는 동안에도 계속해서 애국적인 노래와 소책자를 내놓았다. 평화가 찾아온 후, 1818년 새로 설립된 본대학에 교수로 취임해 근대 역사를 가르쳤다. 이 기간 동안 〈시대의 정신〉의 제4부를 저술하여 독일 제후국들의 반동적인 정책을 비판했다. 개혁의 필요성을 대담하게 주장하여 프로이센 정부의 반감을 산 아른트는 1819년 여름에 체포되었다. 곧 풀려나긴 했으나 강단에는 서지 못했다.
1840년 교수직으로 돌아왔고 그 이듬해 총장으로 임명되었다.
1848년 혁명이 일어나자 프랑크푸르트암마인에서 개최된 국민의회 대표단의 한 사람으로 참석하여 프로이센의 국왕 프리드리히 빌헬름 4세를 독일의 황제로 추대하는 데 동참했다. 그러나 빌헬름 4세가 황제 추대를 거부한 데 분개하여 공직에서 사퇴했다.
그의 모든 서정시가 정치적 색채를 지닌 것은 아니며 아른트 자신도 전적으로 국수주의적인 인물만은 아니었다. 〈시집 Gedichte〉(1804~18, 완성본 1860)에 실린 많은 시들은 매우 아름다운 종교시들이다. 그밖의 주요저서로는 아른트의 삶이 담긴 가장 가치있는 자료인 자서전 〈외적인 삶에 대한 회고 Erinnerungen aus dem äusseren Leben〉(1840)와 〈하인리히 카를 슈타인 남작(男爵)과 함께 한 나의 여행 및 방랑기 Meine Wanderungen und Wandelungen mit dem Reichsfreiherrn Heinrich Karl vom Stein〉(1858)가 있다.
전집으로는 H. 마이스너와 R. 게르츠가 1908년에 16권으로 편집한 것이 유명하다. 아른트에 대한 연구서로는 A. G. 푼트의 〈아른트와 독일의 민족적 각성 Arndt and the National Awakening in Germany〉(1935)과 H. 스쿨라의 〈아른트 E. M. Arndt〉(제2판 1952)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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