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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생 | 1295경, 헨트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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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망 | 1345. 7. 17, 헨트 |
국적 | 플랑드르 |
요약
백년전쟁(1337~1453)의 예비단계에서 중요한 역할을 한 플랑드르의 지도자.
(영). James van Artevelde.
개요
1338년부터 다른 지도자들과 함께 헨트를 지배한 그는 잉글랜드 왕 에드워드 3세와 동맹을 맺어 프랑스 및 플랑드르 백작에 대항했다.
그는 7년 뒤에 일어난 폭동으로 살해당할 때까지 최고 수령의 지위를 유지했다.
생애
반 아르테벨데의 직업은 알려져 있지 않지만 부유한 자산가 계층에 속했고, 헨트와 그 주변지역에 땅을 갖고 있었다.
그의 자녀들이 결혼한 상대를 보면 그가 귀족계층과 관계를 갖고 있었음을 알 수 있다. 그의 2번째 아내인 카텔리네 데 코스테르는 사회생활에 적극적으로 참여한 유능한 여성이었다.
카텔리네는 잉글랜드 왕이 플랑드르의 도시에 주겠다고 약속한 돈을 받기 위해 반 아르테벨데 대신 여러 번 잉글랜드로 갔다. 그들의 아들 가운데 하나인 필리프(1340 태어남)는 1382년 플랑드로 백작 루이 2세에 대항해 반란을 일으켰다. 반 아르테벨데는 중년의 나이에 이른 뒤에야 공적인 문제에 참여하기 시작했다.
1338년 이전에 그의 이름이 언급된 것은 한 번뿐으로, 1325년 헨트에서 플랑드르 백작 루이 1세에 대한 반란이 일어났을 때 루이 편에 선 사람들 중에 그의 이름이 기록되어 있다. 그러나 1330년대에 잉글랜드와 프랑스의 관계가 악화하자, 플랑드르 백작과 플랑드르 도시들 사이에 긴장이 고조되었고 프랑스 왕 필리프 6세의 신하인 루이 1세는 프랑스 편을 들었다. 플랑드르 도시들은 필리프에게서 회유를 받았지만 직물 산업 유지를 위해서는 잉글랜드의 양모(羊毛)가 필요했기 때문에 잉글랜드의 에드워드 3세에게 등을 돌릴 수 없는 형편이었다.
바로 그때 반 아르테벨데가 지도자로 등장했다. 1338년초 헨트 주민들은 그의 지도에 따라 중립을 선언했다. 다른 대도시인 브뤼주와 이프르도 이 선례를 따랐다. 프랑스는 묵인할 수밖에 없었고 잉글랜드와 플랑드르의 중요한 교역은 보호되었다.
반 아르테벨데는 4명의 다른 지도자들과 함께 헨트를 다스렸다. 그의 동료들 가운데 적어도 3명은 부유한 상인이었고 직물업자 대표는 따로 선출되었다. 그리 유명하지 않은 장인들에게 상당한 범위의 권한을 부여한 것은 반 아르테벨데 개혁의 특징이었다. 플랑드르는 불과 2년밖에 중립을 지킬 수 없었다.
1340년초 플랑드르는 잉글랜드와 동맹을 맺어 더 많은 상업이익을 얻었고, 프랑스의 지배 아래 놓인 플랑드르의 일부 지역을 되찾을 수 있도록 도와주겠다는 에드워드 3세의 약속도 받아냈다. 잉글랜드 왕은 이 새로운 상황에 조금이라도 합법성을 부여하기 위해 헨트에서 자신이 프랑스 왕임을 선언했는데(1340. 1. 26) 이것은 아마 반 아르테벨데의 주도로 이루어졌을 것이다. 에드워드는 플랑드르의 슬뤼 항구 근처에서 프랑스 함대를 무찌른 뒤 반 아르테벨데와 함께 프랑스의 투르네 시를 포위했다.
플랑드르 백작은 자신의 신하들과는 달리 프랑스 편에 서서 싸웠고 반 아르테벨데가 이끄는 플랑드르인들은 백작의 권위를 거부했다.
투르네 포위 공격이 끝나고 휴전이 선언되자 플랑드르로 돌아온 백작은 반 아르테벨데의 지지자들이 우위를 차지하고 있는 의회의 지배를 받게 되었다. 루이가 플랑드르에서 탈출하자 반 아르테벨데는 루이의 친척 가운데 부유한 롬바르디아 사람으로 헨트 시민이 된 시몬 반 미라벨로를 섭정으로 임명해 루이를 대신하게 했다. 반 아르테벨데는 제도를 공식적으로 바꾸지는 않았다. 공문서에는 그의 이름이 전혀 나오지 않지만 에드워드 3세의 편지를 보면 반 아르테벨데가 실권을 행사했음을 알 수 있다. 그는 대도시들의 이익을 증진했고, 그의 영향력은 그 대도시들의 지지에 바탕을 두고 있었다.
필요할 때면 그는 대도시의 이익을 위해 작은 도시와 시골 주민의 이익을 희생시켰다.
반 아르테벨데는 한때 행정장관이었던 얀 반 스테엔베케가 그를 권좌에서 끌어내리려는 음모를 꾸미다 실패한 1343년초까지 누구의 도전도 받지 않고 확고한 지위를 유지했다. 그러나 1345년 5월 직공과 직물업자 사이에 갈등이 일어나, 반 아르테벨데가 갖고 있는 권력의 토대인 모든 계층 사이의 균형정책이 막을 내렸다.
그는 최고 수령으로서의 지위를 잃었어도 여전히 에드워드 3세의 신임을 받았는데 이는 그에게 치명적이었다. 1345년 7월 에드워드는 헨트 주민대표들과 동맹관계 연장을 협상하기 위해 슬뤼로 왔다. 동료들은 반 아르테벨데가 에드워드에게 너무 고분고분하다고 여겨 말다툼을 벌였다. 결국 그는 헨트로 돌아오자마자 폭동의 와중에 살해당했다.
평가
야콥 반 아르테벨데는 오랫동안 논쟁의 여지가 많은 인물로 남아 있었다.
17, 18세기에 다소 사람들의 기억에서 잊혀졌던 그의 명성은 19세기에 벨기에 민족주의 역사가들의 노력으로 되살아났다. 반 아르테벨데의 인간성을 평가하기는 어렵다. 지금까지 남아 있는 그에 대한 정보는 대부분 그의 적들에게서 나온 것이다. 오늘날 알려져 있는 그의 글은 1342~43년 겨울에 잉글랜드 왕과 왕비 및 왕세자에게 프랑스어로 쓴 3통의 편지뿐이다. 이 편지들은 사무적인 어조로 씌어 있으며, 과장된 아첨은 찾아볼 수 없다. 그의 행동에서 그를 비범한 인물로 만든 특징 몇 가지를 추론할 수는 있다.
그는 사람들의 욕구 및 그것을 확보할 수 있는 방법에 대해 강한 확신을 갖고 있었으며, 보편적 가치관을 기꺼이 버렸고, 주저없이 행동할 수 있는 능력을 갖고 있었다. 그는 격정적인 기질 때문에 말다툼을 하다가 상대를 죽이기까지 했지만 이런 성미는 그당시 사람들이 대부분 갖고 있던 특징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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