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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생 | 미상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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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망 | 미상 |
국적 | 파르티아 |
요약 1세기에 활동한 파르티아의 왕(12경~38경 재위).
원래 메디아 아트로파테네의 왕이었던 그는 9(또는 10)년에 보노네스한테서 파르티아 왕위를 빼앗았고, 약 2년 뒤 티그리스 강변에 있는 파르티아의 수도 크테시폰에서 파르티아 왕임을 선언했다. 보노네스는 아르메니아로 달아났지만, 아르타바누스는 15(또는 16)년에 그를 강제로 퇴위시켰다. 그의 통치 초기에는 로마와 파르티아 사이에 평화가 유지되었다.
국내는 소란했지만, 그는 강력한 통치자로서 중앙정부가 권위를 되찾는 데 이바지했다. 그가 12월 21일에 행정관들과 수사라는 도시에 보낸 편지는 지금까지 보존되어 있는 아르사크 왕조의 유일한 문서이다.
아르메니아의 아르타크시아스 3세(제논)가 죽자(34/35), 아르타바누스는 아르사케스라는 이름만으로 알려진 아들을 아르메니아 왕위에 앉혔다. 아르타바누스가 중앙정부의 권력을 강력히 주장하는 데 불안해진 파르티아의 귀족이 로마 황제 티베리우스에게 파르티아의 선대 왕인 프라테스 4세의 자손들 중에서 왕을 하나 골라달라고 부탁했다. 그리하여 프라테스의 손자인 티리다테스 3세가 35년에 시리아에 도착했고, 로마 장군인 루키우스 비텔리우스가 그를 파르티아 왕위에 앉혔다.
아르타바누스는 히르카니아로 후퇴했지만, 1년도 지나기 전에 로마 반대파의 부름을 받고 파르티아로 돌아와 다시 왕위를 차지했다. 이 권력 싸움으로 파르티아의 힘이 눈에 띄게 약해져 넓은 지역과 일부 거대한 상업 중심지들이 왕권에서 독립한 것으로 보인다. 전반적인 불만이 높아지자 아르타바누스는 다시 달아날 수밖에 없었고 그는 가신인 아디아베네의 이자테스 2세에게 몸을 의탁했다. 그 사이에 킨나무스가 파르티아 왕위를 차지했다. 아르타바누스는 협상으로 왕위를 되찾았지만, 얼마 되지 않아 죽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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