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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르시노에 2세

다른 표기 언어 Arsinoe II
요약 테이블
출생 BC 316경
사망 270. 7
국적 이집트

요약 이집트에 마케도니아 왕조(프톨레마이오스 왕조)를 세운 프톨레마이오스 1세와 베레니케 사이에서 태어난 딸.

트라키아의 여왕이었으며 뒤에는 오빠인 이집트의 프톨레마이오스 2세의 왕비가 되었다. 두 남편을 이용해 자신의 지위를 강화했으며 마침내 양쪽 왕국에서 모두 막대한 권력을 휘둘렀다.

BC 300년 아르시노에는 트라키아의 왕인 리시마코스와 결혼했다. 그는 에페소스를 그녀의 이름을 따서 개칭하는 한편 그리스 북부에 있는 카산드레아를 비롯해 흑해 연안의 3개 도시를 그녀에게 주었다. 아르시노에는 리시마코스와 전처 사이에 태어난 왕위 계승자인 아가토클레스가 자기 아버지를 죽이려 했다고 고발하여 자신이 낳은 세 아이 중 맏아들이 트라키아의 왕위를 잇도록 하기 위해 애썼다.

나이 들고 의심이 많아진 리시마코스가 아가토클레스의 처형을 명령하자 아가토클레스와 동맹을 맺은 소아시아 페르가뭄의 총독은 셀레우코스 왕조의 셀레우코스 1세에게 도움을 요청했다. 결국 트라키아와 중동의 셀레우코스 왕국 간에 전쟁이 일어났고, BC 281년 리시마코스가 전투중 전사하자 아르시노에는 카산드레아로 도망쳤다. 그녀의 이복 남매인 프톨레마이오스 케라우노스는 셀레우코스 1세를 암살한 뒤 아르시노에를 꾀어 결혼하려 했다. 그러나 그는 카산드레아에 도착하자마자 아르시노에의 어린 두 아들을 처형해버렸다.

아르시노에는 카산드레아를 탈출해 자신의 운명을 다시 한번 개척해보려고 알렉산드리아로 갔다(BC 279경). 그녀가 이집트로 돌아온 뒤 얼마 안 가 프톨레마이오스 2세의 왕비가 남편을 살해하려 한 죄로 고발당했는데 이는 아마도 아르시노에의 계략으로 보인다. 전 왕비는 추방당하고 아르시노에는 BC 277년경 곧 친오빠와 결혼을 했다. 이같은 결혼은 이집트에서는 관행이었으나 그리스인들에게는 비정상적인 일이었다. 따라서 '필라델포이'('남매간의 사랑')라는 말이 두 사람의 이름 뒤에 붙었다. 이집트 정부 안에서 아르시노에의 영향력은 매우 빨리 커졌다. 그녀는 프톨레마이오스를 도와 이집트와 시리아의 셀레우코스 왕조 간에 벌어진 제1차 시리아 전쟁(BC 274~271)을 승리로 이끌었고, 프톨레마이오스의 형제인 아르가이오스와 다른 이복 형제 1명을 반역이라는 흔한 죄목으로 처형했다.

아르시노에는 프톨레마이오스의 모든 칭호를 같이 나누어 가졌으며 혼자 혹은 남편과 함께 주화에 얼굴이 새겨졌고 고유한 왕의 칭호도 가졌다. 그리스의 여러 도시들은 그녀의 이름을 따서 도시명을 정했으며 그리스와 이집트 여러 곳에서 그녀에 대한 봉헌을 했다. 살아 있는 왕을 신과 동일시하는 이집트의 관습에 따라 아르시노에도 역시 살아 있는 동안 신격화했던 것으로 보인다.

BC 270년 아르시노에가 죽은 뒤 여러 곳에서 그녀를 숭배하는 의식이 자리를 잡았다. 프톨레마이오스 왕국의 수도인 알렉산드리아의 경우 '아르시노에이온'이라는 거대한 성지가 세워져 그녀에게 헌정되었다. 프톨레마이오스 2세의 통치가 끝날 무렵에는 카이로 남서쪽에 있는 알파이움 지방(왕은 이곳의 넓은 땅을 개간하도록 했음)을 아르시노에를 기리는 뜻에서 아르시노이테 지방으로 개명하기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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