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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약
에티오피아 중북부의 아도와에서 메넬리크 2세의 에티오피아군과 이탈리아군 사이에 벌어진 전투(1896. 3. 1).
Adowa는 Adwa, Adua라고도 씀.
이 전투에서는 에티오피아군이 대승을 거둠으로써 아프리카에 프랑스와 영국에 버금가는 식민제국을 세우려 했던 이탈리아의 시도를 저지했다. 에티오피아의 승리는 또한 프랑스에게 북아프리카를 가로질러 대서양과 홍해를 잇는 식민제국을 건설할 수 있는 가능성을 열어주었다.
1889년 에티오피아 황제인 요한네스 4세가 죽자 큰 혼란이 벌어졌고 이탈리아는 이러한 혼란을 이용해 셰와(쇼아) 출신의 메넬리크 2세를 도와 제위에 오르게 했다. 또한 이탈리아의 총리 프란체스코 크리스피는 1889년 메넬리크와 체결한 우치알리 조약을 에티오피아가 이탈리아의 보호국이 된 것으로 해석했다.
이에 따라 이탈리아는 1890년 1월 아프리카 내에 있는 그들의 모든 영토를 에리트레아 식민지로 통합했다.
메넬리크는 1890년 9월 먼저 모호한 내용의 조약 제17조를 배격했으며 1893년 9월에는 조약 자체를 거부하면서 이탈리아의 강점에 대비해 전투 준비에 들어갔다. 이탈리아군은 전투 초반에 눈부신 승리를 거두긴 했으나 실익은 없었다. 1895년말 대규모 에티오피아군이 이탈리아군의 전초기지를 위협했다.
이탈리아의 에리트레아 총독인 오레스테 바라티에리 장군은 1896년 2월 7일 에티오피아군을 목격했으나 이들이 아오와까지 물러가는 동안 아무런 행동을 취하지 않았으며 후퇴하려는 태도를 취하기까지 했다. 2월 28일 크리스피는 바라티에리에게 격한 내용의 전문을 보내 행동에 들어가도록 지시했다. 자신의 실책을 만회하는 데 혈안이 된 그는 2만 명의 병력을 이끌고 아도와로 진격해 4배나 더 많은 에티오피아군에 대적하게 되었다. 이탈리아군은 수적으로 열세였을 뿐만 아니라 조직이 흐트러져 있었고 전투 장비도 충분하지 않았다. 3월 1일 에티오피아군에게 치욕스런 패배를 당한 이탈리아군은 매우 험준한 지형을 타고 후퇴하게 되었고 적대적인 주민들의 위협에도 시달려야 했다. 이렇게 해서 전쟁은 끝났다.
1896년 10월 에티오피아는 아디스아바바 조약을 체결해 우치알리 조약을 파기하고 다시 평화를 회복했으며 이탈리아는 에티오피아의 독립을 인정했다. 이로써 이탈리아는 에티오피아 전체를 보호국으로 만들려는 계획을 포기했다. 강화조약(1900. 9)으로 이탈리아의 에리트레아 식민지의 경계가 확정되었으며 약 20만㎢로 그 영토가 축소되었다.
에티오피아는 1908년까지 이탈리아·프랑스·영국과 여러 조약을 더 체결해 유럽 열강이 지배하는 이웃 지역들과 국경선을 확고히 할 수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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