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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나스타시우스 1세

다른 표기 언어 Anastasius I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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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생 430(?), 에피루스베투스 디라키움
사망 518. 7. 9, 콘스탄티노플
국적 비잔틴

요약 비잔틴의 황제(491~518 재위).

제국의 화폐제도를 완성하고 부를 늘렸으며 국내외 업무를 유능하게 처리했다. 그러나 이단적인 단성론에 입각한 종교 정책을 펴 종종 반란을 불러일으켰다.

재무부의 행정관과 제노 황제의 개인 경호원으로 일하다가 61세 때 제노의 미망인 아리아드네에 의해 황제가 되고 나서 곧 그녀와 결혼했다. 그는 집권하자마자 매직 행위를 근절하고 세제를 개혁했으며 밀고자에 대한 보상을 철폐했다.

그는 즉위초에 제노의 동포들로 반항적이고 세력이 강했던 이사우리아인들을 콘스탄티노플에서 추방했고, 나중에 다시 그들을 정착지 트라키아에서 추방했다. 또한 불가리아인과 슬라브인들의 침략으로부터 콘스탄티노플을 방어하기 위해 흑해에서 마르마라 해에 이르는 성벽을 쌓았다(512).

외교면에서는 동고트족의 테오도리크가 이탈리아를 지배하도록 인정했다(497). 그러나 얼마 지나지 않아 두 왕은 적대관계에 놓이게 되어 아나스타시우스는 함대를 보내 이탈리아 해안을 약탈했다(508). 한편 유목민들이 페르시아와 비잔틴 제국을 침입하는 경로였던 '카프카스 문'에 대한 비잔틴 제국의 방위 분담금 지불 요구를 거절함으로써 502년 페르시아와 전쟁을 치르게 되었다. 페르시아의 공격을 받은 후 그는 동쪽 변경을 수비하기 위해 요새들을 짓게 했는데, 이는 442년에 맺은 조약을 위반하는 것이었다. 아나스타시우스가 페르시아 왕에게 분담금을 지불하기로 함으로써 505년 평화조약이 맺어지자 두 나라의 관계는 회복되었다.

그는 처음에는 정통파 신자를 자처했으나 차츰 그리스도가 신성만을 지녔다는 단성론에 집착하게 되었다. 그의 이런 입장은 콘스탄티노플과 유럽에서 커다란 반발을 샀으나 이집트·시리아와는 평화로운 관계를 맺을 수 있게 했다. 그러나 트라키아에서는 군사령관 비탈리아누스가 이로 인해 반란을 일으켰다. 비탈리아누스는 2차례 반란을 일으켰으나 그때마다 보상을 약속받고 철수했다. 그러나 3번째로 반란을 일으켰을 때는 참패했다(515).

아나스타시우스는 조카들을 후계자로 삼으려 했으나 그의 후계자로 각광받던 유스티니아누스의 삼촌이며 수비대 사령관인 유스티누스 1세가 70세의 나이로 제위에 올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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