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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약 〈한서〉에 나온 말. 공리공론을 일삼는 송·명대의 학문을 배격하여 내세운 표어이다. 조선 후기의 실학파에 영향을 미친 학문적 경향이기도 하다. 실학파의 사회개혁 요구는 많은 탄압을 받아 지배층으로부터 배제되었고 실사구시의 측면만이 엄격한 학문방법론으로 추구되었다. 그 대표적인 인물인 북학파 계열의 실학자들의 실증적 연구방법을 계승하여 민족문화에 대한 주체적 인식을 선명히 하고 금석·전고 등에 관한 격조 높은 학문성을 보여주었다. 후에 개화파 사상가들에게 영향을 주게 되는 오경석 등 중인 출신의 인재들과 교유함으로써, 이러한 학문경향과 방법론의 저변 확대에 기여했다.
이러한 학문 태도는 우리나라 실학파(實學派)에도 영향을 미쳤다. 실사구시라는 말은 〈한서(漢書)〉 권53, 경십삼왕·하간헌왕덕전(景十三王·河間獻王德傳)에서 나온 말이다. 청나라초에 고증학을 표방하는 학자들이 공리공론(空理空論)을 일삼는 송(宋)·명대의 학문을 배격하여 내세운 표어이다.
그 대표적 인물로는 황종희(黃宗羲)·고염무(顧炎武)·대진(戴震) 등이 있다. 우리나라에서는 조선 후기에 이르러 주자학적 경전 해석의 극복, 다양한 사회개혁론(社會改革論)의 제기를 통해 당시의 사회 모순을 해결하고자 한 실학파가 나타났는데, 이는 이러한 학문 경향의 영향을 받은 것이기도 했다. 정약용의 경우 경전 해석에 있어서 주자학의 체계를 극복하는 길을 옛 공자(孔子)의 정신을 회복하는 데서 찾고, 그 방법으로서 철저한 고증·실증적 태도를 중요시했다.
그는 이를 바탕으로 주희와는 다른 경전 해석을 제기했는데, 당시 사회 모순에 대한 인식과 사회의 실용적 요구를 반영하는 것이었다.
그러나 토지제도와 신분제도의 개혁을 주요내용으로 한 실학파의 사회개혁 요구는 당시의 현실에서 받아들여지기 어려워 많은 탄압을 받아 지배층으로부터 배제되었다. 이때문에 당시의 실학파 중 성호학파(星湖學派) 중심의 경세치용적인 유파는 거세되고, 실사구시의 측면만이 엄격한 학문방법론으로 추구되었다. 그 대표적인 인물이 북학파 계열의 김정희(金正喜)이다.
김정희는 종래 실학의 사상성(思想性)과 사회개혁의 정열을 겉으로 나타내지 않았지만 선배 실학자들의 실증적 연구방법을 계승하면서 민족문화에의 침잠(沈潛)을 통해서 주체적 인식을 선명히 하고 금석(金石)·전고(典故) 등에 관한 격조 높은 학문성을 보여주었다. 그에게 있어서는 학문은 그 자체가 목적이며, 엄격한 객관적 태도로써 사실을 밝혀내는 것이었다.
그는 〈실사구시설〉에서 "실사구시는 학문을 하는 데 가장 쓸 만한 방법이다. 만약 실사를 일삼지 않고 공소(空疏)한 학술만을 편하다고 여기고, 그 옳음을 구하지 아니하고 옛 사람의 말만을 위주로 하면 성현의 도가 아니다.……학문의 도는……마땅히 실사구시해야 하며 공허한 이론을 따르는 것은 옳지 않다. 대저 성현의 도는 실천궁행하는 데 있으니,…… 널리 배우고 힘써 행하되, 오로지 실사구시 한마디 말을 주로 하여 실천하면 된다"고 하여 실사구시의 방법론과 그 실천을 역설하고 있다.
따라서 그는 청대 고증학의 학문적 성과를 받아들이는 가운데 차차 고문학(古文學)에서 금문학으로 눈을 돌려 위원(魏源)과 같은 학자의 학문을 '실사구시'로 인정하면서, 그의 〈해국도지(海國圖志)〉를 해방(海防)에 필수적인 책으로 높이 평가했다. 또한 그는 후에 개화파 사상가들에게 영향을 주게 되는 오경석(吳慶錫) 등 중인(中人) 출신의 인재들과 교유함으로써, 이러한 학문경향과 방법론의 저변 확대에 기여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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