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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약
최초의 실록은 중국 남조 양무제의 실록인 〈양황제실록〉이다. 이후 당대에서 송대에 걸쳐 계속 편찬되어오다가 청나라 광서제 때 중단되었다. 편찬기관은 당대에는 사관에서 하다가 1139년 〈휘종실록〉을 편찬할 때부터 실록원을 세워 편찬했다.
우리나라에서는 고려 태조 때부터 실록을 편찬했다. 실록을 보관하는 곳을 사고라고 하며, 고려 고종 때 처음 설치했다. 고려의 실록은 〈고려사〉 편찬에 기본사료로 사용되었으나 현재는 전하지 않는다. 조선시대에는 사고를 4곳으로 증설하고 실록도 4부를 편찬하여 보관했다. 현재 태백산본과 정족산본이 남아 있는데, 태조부터 순종까지의 역대 실록이 모두 전한다. 〈조선왕조실록〉은 규모나 상세함이 중국의 실록보다 월등하다. 실록은 궁중의 비록으로 취급되어 소중하게 관리되었다.
개요
중국·한국·일본·베트남 등에서 실록이 편찬되었다.
중국
최초의 실록은 중국 남조 양무제(梁武帝)의 실록인 〈양황제실록〉이다. 이후 당대에서 송대에 걸쳐 체재와 편찬방식이 정비되어 계속 편찬되어오다가 청나라 광서제 때 중단되었다.
군주가 사망한 후 기거주를 주자료로 삼아 여러 공문을 참조하여 일대의 일을 기록했고, 이것은 정사 편찬의 주사료가 되었다. 중요사건과 함께 천재지변, 재상의 약전인 졸기를 반드시 수록했다.
편찬기관은 당대에는 사관에서 하다가 1139년 〈휘종실록〉을 편찬할 때부터 실록원을 세워 편찬했다. 명·청의 실록은 현재 거의 완전하게 남아 있으나 당·송의 실록은 당의 한유(韓愈)가 편찬한 〈순종실록〉, 송의 〈태종실록〉 잔본 20권 등 극히 일부만 전한다. 한편 중국에서는 개인이 자신의 선조의 사실을 기록한 책을 실록이라고 한 사례도 있다.
한국
우리나라에서는 고려 태조 때부터 실록을 편찬했다. 실록을 보관하는 곳을 사고라고 하는데, 고려 고종 때 처음 설치했다. 고려의 실록은 조선의 실록에 비해 간략했던 것 같은데, 태조~목종의 7대실록이 총 36권, 태조~고종의 실록이 187책이었다고 한다. 이것은 전란으로 실록이 소실된 데도 원인이 있다.
1013년(현종 4) 거란의 침입으로 태조~목종의 7대실록이 불타 황주량 등이 재편집한 사실이 있으며, 홍건적의 난 때도 실록이 불타 복구했다고 한다. 또 공민왕 이후의 실록은 편찬되지 못해 조선시대에 들어와서 한꺼번에 편찬되었다. 이들 실록은 〈고려사〉 편찬에 기본사료로 사용되었으나 실전되어 현재는 전하지 않는다.
조선시대에는 사고를 4곳으로 증설하고 실록도 4부를 편찬하여 보관했다. 현재 태백산본과 정족산본이 남아 있는데, 태조~순종의 역대 실록이 모두 전한다. 단 고종·순종의 실록은 일제강점기 때 일본인들이 편찬한 것이다. 〈조선왕조실록〉은 규모나 상세함이 중국보다도 월등한 것으로 세계적인 자료이다.
〈조선왕조실록〉은 왕의 사후 실록청을 건립하여 편찬하는 데 사관의 사초와 춘추관의 기록, 〈승정원일기〉, 각 관사의 등록과 공문서, 상소 등이 기본자료가 되었다. 그러나 체제와 내용의 충실도는 실록마다 조금씩 다르다. 대체로 조선 전기의 실록이 후기의 것보다 충실하다. 조선 후기에는 당쟁의 영향으로 집권당이 바뀌면 '개수실록'이라 하여 실록이 다시 편찬되기도 했다. 실록은 궁중의 비록으로 취급되어 소중하게 관리되었다.
실록 편찬 후 사초는 더이상 볼 수 없도록 물에 빨아 재생지로 가공해버렸으며 완성된 실록은 관원도 함부로 볼 수 없었다. 객관적 서술과 사관의 보호를 위해 왕도 기록중인 사초와 실록을 열람할 수 없는 것이 관례였다.→ 사고, 사초, 조선왕조실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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