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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생 | 1450(세종 32)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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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망 | 1506(중종 1) |
국적 | 조선, 한국 |
요약 연산군의 처남이자 중종의 장인이었던 신수근은 중종반정을 주도한 박원종의 회유를 거부하고 살해당한 뒤 역적으로 기록되었지만 훗날 영조와 사림으로부터 고려 말의 정몽주와 같은 충신으로 추앙받았다.
조선이 창업 초기의 혼란에서 벗어나 순항하던 시기에 돌연 발생한 중종반정은 사림파를 견제하여 왕권을 강화하려던 연산군의 노력을 물거품으로 만들었다. 그것은 아이러니컬하게도 신권을 고양시키려던 사림파가 아니라 왕권에 기대어 권세를 누리던 측근들에 의해 일어났다.
그들은 반정에 성공한 뒤 역사를 조작하여 연산군을 중국 하나라의 걸왕이나 은나라 주왕 같은 희대의 폭군으로 그려냈지만 과도한 상상력을 발휘한 탓에 도처에서 허점이 드러났다. 특히 연산군의 최측근이었던 신수근에 대한 기록을 보면 그들이 얼마나 명분 없는 거사를 벌였는지를 적나라하게 보여준다.
《연산군일기》와 《중종실록》은 신수근이 중상모략으로 남을 많이 해쳤으며 임금의 처남으로서 세력을 과시하며 뇌물과 매직으로 축재를 일삼았다고 비하했다. 하지만 《영조실록》은 그와 반대로 신수근에게는 재산이 별로 없었으며, 반정의 상황에서 괴로워했지만 뜻이 확고했고, 훈척에 연연하지 않았으며 섬기는 바를 바꾸지 않고 자신을 돌보지 않았으니 그 충의가 포은 정몽주와 같다며 극찬하고 있다.
왕실의 인척으로 태어나다
신수근(愼守勤)은 1450년(세종 32년)에 영의정 신승선과 세종의 넷째아들 임영대군 이구의 딸인 중모현주 이씨의 아들로 태어났다. 본관은 거창(居昌), 자는 근중(勤仲), 호는 소한당(所閒堂)이다. 그의 부인 권씨는 세조의 심복이었던 권남의 여섯째딸로 예종 때 분사한 남이의 처제이다. 게다가 누이동생은 연산군의 왕비 신씨이고, 둘째딸은 진성대군의 부인으로 중종반정 이후 왕비가 되었지만 7일 만에 궁궐에서 쫓겨난 단경왕후 신씨이다.
이처럼 왕실과 밀접한 관계를 맺고 있던 신수근은 성종 때 과거를 보지 않고 음보로 조정에 진출했다. 25세 때인 1475년(성종 6년) 임금이 동대문 밖 선농단에 나아가 제사를 지낼 때 제상을 차리는 수조관을 지냈고, 1484년(성종 15년)에는 청요직인 사헌부 장령에 임명되었다. 《연산군일기》의 사관들은 이때 그의 활동을 실록에서 고의로 누락시키면서 ‘집안 세력을 믿고 교만하고 방종했다.’라고 몰아붙였다.
1487년(성종 18년) 3월, 성종과 인수대비는 16세인 신수근의 누이 신씨를 세자빈으로 간택했다. 이때 세자 연산군의 나이는 12세였다. 그해 7월 아버지 신승선은 정2품 정헌대부로 승품되었고, 9월에 의정부 좌참찬에 제수된 뒤 예조판서, 이조판서 등 요직에 두루 서용되었다. 신수근은 1492년(성종 23년) 2월 임금을 지근거리에서 보좌하는 동부승지에 제수되었다. 하지만 그해 9월 좌부승지로 자리를 옮겼을 때 친구와 함께 승정원 협방에서 술을 마신 혐의로 사간원의 탄핵을 받아 파직되었다.
그때부터 반년 동안 근신하던 신수근은 1493년(성종 24년) 윤5월에 무관직인 중추부 첨지부사에 임명되었다가 그해 6월 호조 참의가 되어 문관 직에 복귀했다. 1494년(성종 25년) 11월에는 아버지 신승선이 우의정에 제수되어 영의정 윤필상, 좌의정 노사신과 함께 성종대의 치적을 이끌었다.
세자의 약재를 직접 시험하다
신수근은 어린 시절부터 귀 뒤에 종기를 앓았는데 평생 낫지 않아 괴로움을 겪었다. 그가 호조 참의로 복무하던 1493년(성종 24년) 경 세자인 연산군 역시 오랜 종기로 고생하고 있었다. 그 사실을 알게 된 세자시강원 보덕 조지서가 의서에서 종기를 낫게 하는 처방을 찾아낸 다음 성종에게 아뢰었다.
황국사 ・ 임하부인 ・ 와거경, 이 세 가지 약재를 빻아 고운 가루로 만들고, 꿀에 타서 종기 부위에 붙이면 효과가 있다고 합니다. 그 중에 황국사는 묵정밭에서 잘 난다고 합니다.
성종이 몹시 기뻐하며 약재들이 자생하는 진주의 목사 허황에게 약을 지어 바치게 했다. 그러나 검증되지 않은 약을 함부로 쓸 수 없었으므로 그해 8월 세자와 같은 병을 앓고 있는 신수근을 어전으로 불러들여 물었다.
“그대의 귀 뒤에 종기가 있다고 하는데, 정말 그런가?”
“신의 나이 열 살 전에 종기가 터져서 구멍이 났는데 깊이가 겨우 2푼이고 그 구멍이 바늘 크기와 같지만 아프지도 않고 가렵지도 않았습니다. 의원의 말을 듣고 뜸질한 뒤에도 구멍은 예전과 같은데 지금도 때때로 간혹 흰 즙이 나오기도 하고 누른 즙이 나오기도 합니다.”
신수근의 말을 들은 성종은 내약방에 명하여 진주에서 진상한 종기약을 그에게 주어 약효를 시험하게 했다. 훗날 왕위에 오른 연산군은 그렇듯 자신을 위해 임상시험을 마다치 않았던 신수근을 총애하지 않을 수 없었을 것이다. 하지만 약재를 추천한 조지서는 활달하여 밖에 나가 놀기를 좋아하던 연산군에게 공부를 강요하여 미운 털이 박힌 탓에 훗날 갑자사화가 일어나자 체포되어 비참하게 죽었다.
부자가 함께 조정을 이끌다
연산군은 단종 이후 처음으로 궁궐에서 태어난 원자였다. 준비된 제왕으로서 학문이 뛰어났을 뿐만 아니라 문학에 재능이 있었고 효성도 지극했다. 1494년 12월(성종 25년) 성종이 승하하고 19세였던 연산군이 즉위하자 처남 신수근은 호조 참의, 장인 신승선은 우의정으로서 임금을 보필했다.
즉위 초기 연산군은 암행어사를 파견하여 민심을 바로잡고 과거를 열어 인재를 등용하는 등 뛰어난 정치력을 선보였다. 1495년(연산군 1년) 3월에 신승선은 좌의정, 5월에 신수근은 좌부승지가 되었다. 그해 9월 신수근은 명나라 사신을 접대하기 위해 선위사로 평안도에 다녀온 다음 연산군에게 〈편의사사(便宜四事)〉를 건의하여 관철시켰다.
‘당장 시행하면 편리하다.’는 뜻이 이 정책은 첫째, 경기도·황해도·평안도의 역로가 피폐하니, 금년도에 한하여 역둔전(驛屯田)의 세금을 받지 말 것. 둘째, 평안도 압록강 강변에 수자리 사는 군사들이 가난하여 방어 장비를 스스로 갖추지 못하니 군기시의 낡은 갑옷과 본도의 목장에서 키우는 말들을 적당하게 나누어 줄 것. 셋째, 목책을 지키는 권관을 학식과 무재가 있는 사람으로 임명하여 보낼 것. 넷째, 압록강 강변에서 오랑캐를 정탐하는 사람들의 수고가 많으니, 예전대로 녹용할 것이었다.
그해 10월 신승선은 영의정이 되어 의정부를 주재했고, 신수근은 이듬해부터 우승지와 좌승지가 되어 임금을 보좌했다. 1497년(연산군 3년) 4월 신승선은 영의정에서 물러났지만 신수근은 그해 6월 승정원의 우두머리인 도승지가 되었다. 당시 사림파가 장악한 대간이 외척의 득세를 우려하며 그의 승진을 반대했지만 12월에 왕비 신씨가 세자 이황을 낳자 입을 다물었다.
무오사화, 사림파의 몰락
연산군 대에 일어난 무오사화와 갑자사화는 강력한 왕권을 지향했던 연산군과 사림파를 축출하려던 훈구세력, 앞의 두 세력을 견제하고 통제하려 했던 사림파의 오랜 갈등이 폭발한 사건이었다. 성종 치세 중반 김종직의 등용과 함께 조정에 진출한 사림파는 성종 말년부터 홍문관 ・ 사헌부 ・ 사간원을 장악하고 훈구파와 반목하면서 파란을 예고했다.
1498년(연산군 4년)부터 시작된 《성종실록》 편찬이 시작되었는데, 훈구파인 이극돈은 김일손이 기초한 사초에서 그의 스승 김종직이 쓴 〈조의제문(弔義帝文)〉을 발견했다. 그는 김종직에게 사감이 있었던 유자광과 함께 이 글이 단종을 죽인 세조를 조롱한 것이라고 연산군에게 고발했다. 그러자 분노한 연산군은 사림파에 대한 일대 숙청에 돌입했다.
그해 7월 연산군은 이미 사망한 김종직을 부관참시하고 김일손, 권오복, 권경유 등을 능지처참했으며 이목, 허반을 참형에 처한 다음 강겸, 표연말, 홍한, 정여창 등 20명을 유배형에 처했다. 아울러 사림파의 근거지인 성균관을 폐쇄하는 등 극단적인 조치를 단행했다. 당시 도승지였던 신수근은 원상 윤필상, 노사신, 한치형 등과 함께 유자광과 이극돈이 주도하는 국청에 참여했고, 이조판서가 되어 인사권을 거머쥐었다.
1500년(연산군 6년) 3월, 연산군은 신수근이 병을 핑계로 사직하자 그를 체직시키고 실권이 없는 돈령부 판사에 임명했다가 그해 4월 우찬성으로 승진시켰다. 1501년(연산군 7년) 6월, 신수근은 둘째왕자 창녕대군 이인이 태어나자 안태사가 되어 아기의 태를 명산에 묻었다. 1502년(연산군 7년) 5월 아버지 신승선이 향년 67세로 세상을 떠나자 그는 동생 신수겸·신수영과 함께 벼슬에서 물러나 양주에서 시묘살이를 했다.
그 무렵 세종의 여덟째아들 영응대군의 사위인 의금부 판사 구수영이 연산군의 총애를 받으면서 세도가 신수근 3형제를 능가하기에 이르렀다. 1503년(연산군 9년) 연산군은 휘순공주를 구수영의 둘째아들 구문경과 혼인시키고 노비 60구와 벼 8천석을 하사하기까지 했다. 당시 연산군이 구수영, 임숭재, 강혼 등과 함께 연회와 사냥으로 세월을 보내며 정사를 멀리하자 사람들은 신수근을 비난했지만 이미 권력의 중심에서 물러난 그는 아무런 방책도 찾지 못했다.
반정에 합류를 거부하다
1504년(연산군 10년) 3월, 임사홍으로부터 생모 윤씨의 폐출과 사사 과정을 전해들은 연산군은 몹시 분개하면서 윤씨를 시기하여 죽게 한 엄숙의와 정숙의를 잡아들여 때려죽였다. 이어서 윤씨를 폐출시킨 할머니 인수대비를 머리로 들이받아 숨지게 했다. 이어서 성종과 함께 윤씨 폐출을 논의한 신료들을 모조리 체포하여 대역죄로 다스렸다. 이 사건이 바로 왕권을 무시하던 훈구파와 사림파를 함께 수렁으로 몰아넣었던 갑자사화이다.
당시 연산군은 윤필상 ・ 한치형 ・ 한명회 ・ 정창손 ・ 어세겸 ・ 심회 ・ 이파 ・ 김승경 ・ 이세좌 ・ 권주 ・ 이극균 ・ 성준을 ‘12간신’으로 지목하고, 살아있던 윤필상 ・ 이극균 ・ 이세좌 ・ 권주 ・ 성준 5명을 극형에 처했으며, 이미 죽은 사람들은 부관참시에 처했다. 또 그들의 가족들을 연좌시켜 자식들을 모두 죽이고 부인을 노비로 삼았으며 집을 허물어 연못으로 만들었다. 이 참혹한 사화의 서슬에 100여 명이 화를 당했고, 심지어 신수근 부자까지 연루되었다. 하지만 연산군은 신수근이 중전 신씨의 오빠라는 이유로 사면해 주었고, 그해 7월에는 그를 돈령부 첨정으로 임명했다.
그때부터 이조 참판 성희안과 평성군 박원종이 은밀하게 반정을 도모했다. 세부계획은 성희안이 세웠고 박원종은 동조 세력을 규합했다. 사료에 따르면 성희안은 연회에서 실수하여 좌천되자 앙심을 품었고, 박원종은 월산대군의 부인이었던 누이가 과부가 된 뒤 연산군에게 능욕을 당하자 복수심을 품었다고 한다. 하지만 실상은 사림파의 반정 기운이 농후해지자 선수를 쳐서 정권을 장악하려던 것이었다.
두 사람은 상의 끝에 성종의 적자인 진성대군을 옹립하기로 결정하고 이조 판서 유순정, 우의정 강귀손, 무령군 유자광을 포섭했다. 이어서 그들은 세력을 확대하기 위해 당시 좌의정이었던 진성대군의 장인이자 중전 신씨의 아버지 신수근을 끌어들이기로 했다. 과거 신수근이 호조 참의로 있을 때 박원종은 병조 참의로서 함께 대마도로 도망친 왜인의 송환을 건의했을 만큼 두 사람의 친분은 두터웠다.
주모자인 박원종의 뜻에 따라 신수근을 찾아간 우의정 강귀손은 “누이와 딸 중 어느 쪽이 더 정이 가는가?”하며 넌지시 물었다. 이에 신수근은 정색하면서 “다만 세자의 영명함을 믿을 뿐이다.”라고 대답했다. 그것은 현재 연산군의 치세가 험악하지만 세자가 보위를 이어받으면 문제가 없을 것이라는 뜻이었다.
영조 대의 대제학 이덕수가 남긴 《서당사재(西堂私載)》 〈좌의정 신공 시장(左議政愼公諡狀)〉에는 이와 관련하여 매우 흥미로운 장면이 담겨 있다. 당시 박원종이 직접 찾아와 거사에 동참을 요구하자 신수근은 “내가 이미 임금으로 섬겼는데, 매부를 폐위하고 사위를 세우는 일은 못하겠다.”고 거절했다는 것이다.
이튿날 박원종이 다시 신수근을 찾아가 함께 장기를 두다가 일부러 장(將)을 집어서 궁(宮) 자리에 놓았다. 궁은 임금을 뜻하므로 박원종의 행동은 곧 군사를 일으켜 임금을 바꾸자는 뜻이었다. 그러자 신수근이 장기판을 밀치고 벌떡 일어나면서, “차라리 내 목을 잘라라.”라고 소리쳤다. 결국 박원종은 신수근을 회유할 수 없음을 알고 돌아섰다고 한다.
1505년(연산군 11년) 8월, 명나라 무종이 즉위하자 연산군은 신수근을 우의정으로 승진시킨 다음 하등극사로 북경에 보냈다. 9월에는 장악원을 연방원으로 개칭한 다음 지방기를 대거 서울로 불러들였고, 자식이 없는 궁인들을 위해 동서행각을 세워 죽은 궁인들의 신주를 안치하고 제사지내게 했다. 이듬해 2월 신수근이 북경에서 돌아오자 연산군은 승지 권균, 강혼을 보내 맞이하게 하고 어제시를 지어주며 치하했다.
중종반정, 불사이군의 길을 걷다
두 차례의 사화를 통해 절대왕권을 확보한 연산군은 자신의 치세가 태평성대임을 확신하면서 파격적인 정책을 펼쳤다. 북경에서 나귀를 사와 번식시키는 한편, 민간에 사라능단 직조법을 전파하여 민생의 안정을 도모했다. 아울러 사대부들의 장례식을 하루로 한 달을 치게 하는 이일역월제(以日易月制)를 시행하고 상중에 육식을 허용하기까지 했다.
연산군은 또 성균관과 사학의 유생을 규찰하여 성종 이래 사치와 방만을 일삼던 양반계층을 압박했다. 1504년(연산군 10년)에는 비어 있는 성균관에서 소혜왕후를 위한 연회를 베풀었는데, 이는 사림에게 유교의 성지를 더럽혔다는 빌미를 주었다. 1506년(연산군 12년) 8월에는 자신에게 정무를 보고할 때 영의정이라도 존칭을 빼게 했으며, 공자에게 올릴 작헌례를 시행할 때는 그의 직분이 신하라 하여 재배만 하게 하는 등 유교의 복잡한 의례를 배격하고 간소하고 실질적인 의례를 권장했다.
이와 같은 연산군의 행보는 양반사대부 계층에게 성리학을 기반으로 하는 조선의 정체성을 파괴하는 폭거로 간주되면서 유림을 중심으로 반정 분위기가 높아졌다. 1505년(연산군 11년) 정초에는 임금을 폭군으로 규정하며 정변을 선동하는 종루벽서사건이 일어났다. 그러자 연산군은 유배 중이던 사림에 대한 감시를 강화하면서 대신들에게 풍류나 여색보다 간신들이 나라를 망친다며 자신의 정책에 적극 협력하라고 다그쳤다.
하지만 그는 사림파 인사들만 경계했을 뿐 늘 곁에서 아부를 일삼던 신료들의 변심은 알아채지 못했다.
1506년(연산군 12년) 9월 1일, 연산군의 최측근이었던 성희안과 박원종, 유순정, 유자광 등이 급거 반정을 일으켰다. 그들은 한밤중에 군사를 이끌고 훈련원에 집결한 다음 돈화문 앞에 진을 쳤다. 거사 소식이 알려지자 많은 사람들이 동조했는데, 특히 제거 1순위였던 돈령부 판사 구수영, 도승지 강혼까지 무리를 이끌고 달려와 합세했다.
당시 진성대군은 반정군이 자신을 옹립한 사실을 몰랐으므로 두려운 나머지 다른 집으로 피신했고, 자신을 모시러 온 성종의 13자 이인 등에게 왕위를 사양하기까지 했다. 성종 비 자순대비는 진성대군의 즉위 허락을 받으러 온 박원종에게 세자 이황을 즉위시키는 것이 좋겠다고 말했지만 박원종은 끝내 진성대군을 고집하여 뜻을 관철시켰다.
반정의 주동자인 박원종은 심복 신윤무에게 반정을 반대했던 신씨 형제와 간신들을 제거하라고 명령했다. 그러자 이심을 비롯한 10명의 자객들이 형조판서 신수영, 좌참찬 임사홍을 죽인 다음 좌의정 신수근의 저택을 찾아갔다. 그들은 별감 한 사람을 내세워 신수근에게 임금의 소집 신패인 명패(命牌)를 보이고 입궐을 재촉했다. 그러자 신수근이 어명인 줄 알고 말에 올라 급히 대궐로 향했다.
자객들은 그가 수각교에 이르자 일제히 달려들어 철퇴를 휘둘렀다. 그로 인해 신수근은 비참한 최후를 맞이하고 말았다. 당시 그의 나이 54세였다.
9월 2일, 날이 밝자 반정 소문을 들은 백성들이 돈화문 앞으로 몰려들었다. 출근하던 백관들도 앞 다투어 반정군에 가담했다. 그 소식을 전해들은 연산군은 “이같이 태평한 때에 어찌 다른 변고가 있겠는가?” 하면서 도총관 민효증과 입직승지 이우에게 대궐 안팎을 점검하게 했다. 하지만 겁먹은 도총관과 입직승지, 내관 등은 물론이고 창덕궁을 지키던 군사들까지 담을 넘거나 수구문을 통해 도망쳤다.
알고 보니 반란의 핵심 세력은 두 차례의 사화로 원한을 품은 사림이 아니라 어제까지 충성을 다짐하던 조정 신료들이었다. 그들은 사림세파가 거사를 결행하면 제일 먼저 숙청될 인물들이었다. 실로 어처구니없는 상황이 연출되자 낙심한 연산군은 저항을 포기했다.
박원종은 승지 한순과 내관 서경생을 창덕궁으로 들여보내 연산군으로부터 옥새를 빼앗은 다음 자순대비의 교지를 받들어 진성대군을 왕으로 받들었다. 그날 오시(午時)에 중종이 경복궁 근정전에서 즉위식을 올렸다.
가문이 풍비박산 나다
반정에 성공리에 마무리되자 연산군은 강화도 교동으로 유배되었고 폐비된 중전 신씨는 성종의 후궁들이 살던 정청궁으로 쫓겨났다. 세자 이황과 창녕대군 이인은 강화도에 유배되었다가 사사되었다. 《거창 신씨 족보》에 따르면 박원종은 9월 4일, 자객 이심을 개성으로 보내 신수근의 첫째 동생인 개성 유수 신수겸을 척살했다.
중종 대의 문신 이자의 《음애일기》에는 당시 이심이 자신의 공로를 과시하기 위해 며칠 동안 옷과 얼굴에 묻은 피를 씻지 않아 사람들이 더럽고 추하게 여겼다고 기록되어 있다.
반정공신들은 또 죄인의 자식은 국모가 될 수 없다며 중종을 겁박하여 9월 9일 단경왕후 신씨를 폐출하고 윤여필의 딸을 왕비로 삼았다. 이때 중전이 된 장경왕후 윤씨의 어머니 박씨는 박원종의 누이였다.
그로 인해 대궐에서 쫓겨난 중종의 폐비 신씨는 하성위 정현조의 집에 머무르다 본가로 돌아왔다. 이때 정청궁에 있던 연산군의 왕비 신씨도 본가에 돌아와 있었으므로 신승선, 신수근의 집에 폐출된 두 왕비가 함께 머물렀다. 그런데 반정공신이 된 구수영이 아들 구문경의 부인 휘순공주를 쫓아내자 그녀 역시 신수근의 집으로 들어왔다. 그렇듯 남자들이 모두 죽거나 귀양 간 빈 집에 궁궐에서 쫓겨난 세 여자가 모여 살았다.
일찍이 잠저에 머물 때 중종과 금슬이 매우 좋았던 단경왕후 신씨는 남편을 그리워하며 매일 집 뒤에 있는 인왕산에 올라가 큰 바위에 치마를 펼쳐 놓았다. 그로 인해 인왕산에 ‘치마바위[裳巖]’ 설화가 생겨났다. 중종 역시 그녀를 그리워했으므로 1510년(중종 5년) 장경왕후가 인종을 낳다가 세상을 떠나자 사림파인 조광조, 김정, 박상 등이 그녀를 복위시키고자 했다. 하지만 얼마 지나지 않아 훈구파 남곤, 심정, 홍경주 등이 주도한 기묘사화가 일어나면서 사림파가 궤멸되자 그녀의 복위가 무산되었다.
정몽주와 비견되는 충신으로 추앙받다
그 후 반정공신들은 정사인 실록을 통해 신수근을 비하함으로서 자신들의 명분 없는 행위를 미화시키려 했다. 《중종실록》에는 신수근이 오랫동안 이조를 맡아 거리낌 없이 방자했으며, 뇌물이 폭주하여 문정이 저자와 같았고, 조그만 원수도 남기지 않고 꼭 갚았는데, 주인을 배반한 노비들이 앞 다투어 그에게 투탁했으며, 호사를 한없이 부려 참람함이 궁금(宮禁)에 비길 만했다고 비난했다. 또 《연산군일기》의 〈신승선 졸기〉에는 신수근 3형제가 연산군의 처남으로서 권력을 전횡하여 축재를 일삼고 무도한 짓을 많이 했다고 매도했다.
신승선에게 아들 세 사람이 있었다. 신수근은 성질이 음험하여 남을 해치고 세력을 믿고서 거만하여 자기에게 거슬리는 사람이 있으면 문득 배척하고 남의 재물을 자기 것처럼 빼앗았는데, 심지어 남의 가옥과 전답을 빼앗고도 뻔뻔스럽게 부끄러워하지 않았다. 신수겸은 용렬하고 경망하며 무식했다. 신수영은 욕심이 많고 방종하며 음험했는데 교활함이 신수근과 비슷했으며, 성질을 내고 남을 해치는 짓은 신수근보다도 더했다.
그러나 인종 대에 신수근과 그의 딸 단경왕후 신씨가 신원되어 명예를 회복했다. 1739년(영조 15년) 영조는 신수근이 끝까지 충심을 버리지 않고 불사이군(不事二君)의 지조를 지켰다며 익창부원군, 영의정으로 추증하고 ‘신도(信度)’라는 시호를 내렸다.
영조는 또 1775년(영조 51년)에 손수 ‘고금동충(古今同忠. 옛날이나 지금이나 충성은 똑같다.)’이라는 네 글자를 써서 후손들에게 내려주었다. 아울러 ‘신수근의 충성과 의리가 고려 말의 충신 정몽주에 못지않다.’고 치하하면서, 호조에 명하여 무덤가에 사당을 지어주고 비각을 세워 그를 추앙하게 했다. 당시 대제학 이덕수는 〈좌의정 신공 시장〉에서 그를 이렇게 칭송했다.
신수근은 아버지와 아들 양대에 걸쳐 정승이 되어서 가문이 고귀해지고 집안이 번성했을 뿐만 아니라, 아울러 왕실의 외척이 되었으므로, 자기가 원하면 이루지 못할 일이 없었다. 하지만 그는 산업에 조금도 관심을 기울이지 않아 자식들에게 재산을 분배할 때 겨우 노비 몇 명뿐이었으니, 여기에서 그의 사람됨을 알 수 있지 않겠는가? 신수근이 만약 박원종의 뜻을 따랐다면 정국공신 1등이 되고, 또 국구의 존귀한 자리에 올라 그 부귀영화가 도리어 눈부시지 않았겠는가? 하지만 그는 피차의 목숨을 바꾸지 않고, 끝내 자기 자신이 죽음으로써 일을 마무리하면서도 후회하지 않았다. 이처럼 신수근은 연산군을 위해서가 아니라 만세에 영원할 군신 간의 의리를 지키기 위하여 죽음을 선택했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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참고자료
- ・ 《조선왕조실록》 이상각 지음. 들녘. 2007.
- ・ 《연산군-그 인간과 시대의 내면》 김범 지음. 글항아리. 20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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