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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생 | 1899. 3. 15, 평북 정주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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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망 | 1969. 3. 13 |
국적 | 한국 |
요약 독립운동가.
본관은 영산(靈山). 호는 인산(仁山). 이명은 이광제(李光濟). 1919년 3·1운동에 참가한 뒤 상하이[上海]로 망명하여 천도교대표부에서 활동하는 한편, 이광수(李光洙)·이영렬(李英烈) 등과 독립신문사에 근무했다. 임시정부가 개조파와 창조파로 나뉘는 등 내분이 일어나자, 한·중 양국민의 통일전선을 결성하고 애국청년들을 교육시켜야 한다는 신념을 가지고 난징[南京]으로 갔다. 이곳에서 많은 청년들을 각 학교와 군관학교에 입학시키고, 비밀단체를 조직하여 선우혁(鮮于爀)·최능현(崔能賢)·조염석(趙念錫)·차진주(車鎭周) 등과 함께 일제의 주구들을 숙청했으며, 중국학생회·중국혁명당과 연락을 취하면서 항일운동을 했다.
1925년 중국국민당에 가입하고 1926년 중국혁명에 참가하여 장제스[蔣介石] 총사령부에 근무함으로써 중국국민당 요인들과 친분을 갖게 되었다. 1927년 2월 김규식(金奎植)·유자명(柳子明)·안재환(安載煥) 및 중국인 무광뤼[睦光錄]·왕탸오바오[王條堡]와 인도인 간타싱·비신싱 등과 함께 동방피압박민족연합회를 조직하고 한국대표 및 상무위원으로 활동했다. 1929년 민족진영의 단결을 위하여 안창호·김구 등이 한국독립당을 조직하자 난징 지부를 설치하고 박찬익(朴贊翊)·최능현과 함께 간부로 활약했으며, 1930년 중국 국립중앙대학 정치과를 졸업했다. 같은 해 만보산사건이 일어나자 이를 해결하기 위하여 중국정부와 교섭했다. 1933년 이유필(李裕弼)·안경근(安敬根) 등과 한국독립당대회를 개최하여 이사로 활동했으며, 6월에는 대일전선통일동맹을 조직하고 각 단체의 대일전쟁 합작과 각 당의 통합을 추진했다.
1934년에는 유동열(柳東說)·김규식·최동오(崔東旿) 및 중국인 마뎬산[馬占山]·청윈[誠允] 등과 함께 한중연합군을 창설했다. 1935년 여름 난징에서 각 단체의 사상과 주의를 초월하여 독립전선을 구성하려는 목적하에 양기탁(梁起鐸)·유동열·이청천·현익철(玄益哲) 등과 민족혁명당을 조직하여 중앙상임위원으로 선임되었으며, 기관지로 〈민족혁명〉·〈우리길〉을 발행했다. 1937년 7월 중일전쟁이 일어나 이에 대한 대비책으로 여러 단체들이 임시정부의 외곽단체로 한국광복전선을 결성하자 적극 참여했다.
1940년 임시정부 외교위원, 1941년 신한민주당 상무위원 겸 비서장, 1942년 한중문화협회 이사로 선임되었다. 1945년 귀국한 뒤 단국대학교 강사, 청구대학교 교수, 외무부 자문위원, 한국독립당 최고위원, 독립동지회 부회장 등을 역임했다. 1963년 건국훈장 국민장을 받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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