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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맥주입을 통한 시체방부보존법은 18세기에 영국에서 시작된 것으로 여겨진다. 실제로 이 방법은 17세기 전반기에 유명한 영국의 생리학자인 윌리엄 하비로 하여금 혈액순환을 발견하도록 이끈, 시체의 동맥에 색깔 있는 용액을 주입하는 실험을 통해서 발전되었다. 그후에 네덜란드의 과학자인 프레데리크 로이스와 독일의 과학자 가브리엘 클라우데루스가 시체의 부패를 막기 위해 이와 비슷한 동맥주입법을 사용한 것으로 생각된다.
그러나 시체를 보존하는 방법으로서 동맥과 강(腔)을 이용한 시체방부보존법을 처음으로 완전히 기술한 것은 스코틀랜드의 해부학자인 윌리엄 헌터(1718~83)로 인정된다. 그의 동생인 존 헌터가 1775년에 자신의 육체가 지상에 존재하는 동안만 남편에게 자신의 재산을 사용할 수 있게 유언한 마르틴 반 부첼 부인의 시체를 방부보존한 이후, 윌리엄 헌터의 새 방법은 크게 주목받게 되었다. 그러한 상황에 직면하자 반 부첼은 그의 부인의 시체를 방부보존한 뒤에 아름다운 옷을 입혀서 거실의 유리상자에 넣어두고 정기적으로 방문했던 것이다.
시체방부보존에 대한 수요는 영국, 그리고 특히 미국에서 증가했으며, 그곳에서는 관습적인 방법보다 우수한 시체방부보존이 새롭게 부상한 장의사 그룹들에 의해 촉진되었다. 시체를 운송하거나 보이기 위해서 얼음을 꽉 채워 싸거나 머리에서 발까지 꼭 맞는 움푹 팬 상자에 얼음을 채운, 이른바 냉각판에 넣는 방법을 쓰는 등 보기 흉하고 때로는 불만족스러운 형태로 이루어졌다. 몇몇 적극적인 기업가들은 잘 보존된 시체들을 가게의 진열장에 전시하기도 했으며, 시골지역이나 작은 읍내의 사람들이 발전된 최신 방법을 볼 수 있도록 그것들을 가지고 여행하기도 했다.
미국의 남북전쟁은 시체를 인위적으로 바꾸는 것에 대한 대중적 반감이 무너지고 동맥주입을 통한 시체방부보존법이 정착되게 된 전환점이었다. 정부가 전쟁에서 사망한 사람들을 위해 국립묘지를 세우긴 했으나, 군인들의 시체를 집으로 보내기 위해서 장의사들과 시체방부보존 기술자들 간의 계약이 자유롭게 이루어졌다. 군인들의 집에서 이러한 방법들을 많이 이용했고, 또 에이브러햄 링컨 대통령의 아들인 윌리의 시체와 후에 링컨 대통령 자신의 시체도 방부보존됨에 따라 이 방법은 점차로 널리 받아들여졌으며 심지어는 애국적인 행동들과 연관된 것으로까지 여겨지게 되었다.
초기에는 관을 만드는 회사의 외판원인 조지프 H. 클라크와 같은 많은 활동적인 판매원들이 방부보존법을 행했다. 시체방부보존사업이 유망하며 이윤이 크다고 생각한 클라크는 신시내티에 있는 의과대학의 어떤 교수를 설득하여 1882년 시체방부보존을 위한 짧은 강좌를 만들었는데, 이는 미국에서의 매장기술 교육의 기초를 세운 것이었다. 시체방부보존은 아직도 장의사업 중에서 유일하게 전문적인 기술이 필요한 부분으로 남아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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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aum백과] 근대적 시체방부보존법 – 다음백과, Dau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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