백과사전 상세 본문
출생 | 1240경, 브라방 공국 |
---|---|
사망 | 1281/84, 토스카나 오르비에토 |
국적 | 벨기에 |
요약 프랑스의 철학교수.
그리스와 아랍의 철학저서들이 라틴어로 번역되면서 파리대학의 인문학부 교수들에게 새로운 사상이 유입될 무렵 파리에서 생긴 급진적·이단적 아리스토텔레스주의 학파의 주요 대표자이다. 1260년경부터 그와 일부 동료 학자들은 정통 아리스토텔레스주의와 그리스도교 신앙을 뒤섞어놓은 교회의 공식 가르침을 무시하고 아리스토텔레스의 저서를 순수하게 합리적으로 재해석한 내용을 강의하기 시작했다.
시제가 자주 언급한 철학자로는 아리스토텔레스 외에도 프로클로스(410~485), 이븐 시나(980~1037), 아베로에스(1126~98), 토마스 아퀴나스(1225?~74) 등이 있다.
시제는 그의 이름이 세상에 처음 알려진 1266~76년 파리의 아리스토텔레스주의에 대한 각종 논쟁에서 명성을 날렸다. 프란체스코 수도회의 총장인 보나벤투라와 도미니쿠스 수도회 총장인 아퀴나스는 모두 그의 가르침을 공격했다. 1270년 파리 주교 에티엔 탕피에는 시제와 그의 지지자들의 주장에 13개의 오류가 있다고 유죄판결을 내렸다.
6년 뒤 프랑스에서 로마 가톨릭 교회의 심사관이 이단 혐의로 시제와 다른 두 사람을 소환했으나 이들은 이탈리아로 피신하여 거기서 교회법정에 탄원했던 것 같다. 그러나 몇 달 뒤 1277년 3월 탕피에는 219개의 오류를 추가한 판결문을 발표했다. 시제가 교황 마르티누스 4세의 재위기간중인 1284년 11월 10일 전에 오르비에토에서 미친 성직자의 칼에 찔려 죽은 것으로 미루어볼 때 그는 수도원에 연금되어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단테는 〈신곡〉에서 시제를 12명의 빛나는 영혼 속에 포함시키면서 빛의 천국에 올려놓았다. 그의 저작은 점차 빛을 보기 시작해 20세기 중반까지 그가 쓴 것으로 보이는 14권의 저서와 6권의 아리스토텔레스 주석집이 알려졌다. 그중에는 〈형이상학의 문제 Quaestiones in metaphysicam〉·〈불가능성Impossibilia〉(6개의 궤변 논증이 실려 있음)·〈지적 영혼에 대한 논문 Tractatus de anima intellectiva〉 등이 있다. 특히 〈지적 영혼에 대한 논문〉에서는 인간에게 단 하나의 지적 영혼만이 있으며 따라서 의지도 단 하나뿐이라는 그의 기본 신조를 논의하고 있다. 이 영혼은 영원하지만 개별 인간이 불멸하지는 않는다. 시제는 비록 명확하게 표현하지는 않았지만 이러한 견해를 통해 교회 교리에 대한 반감을 드러내는 동시에 철학의 독자성과 자율성을 강조했다.
본 콘텐츠의 저작권은 저자 또는 제공처에 있으며, 이를 무단으로 이용하는 경우 저작권법에 따라 법적 책임을 질 수 있습니다.
철학가와 같은 주제의 항목을 볼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