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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베리아 이민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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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약 조선 후기 이래 시베리아 지방으로 가서 토지를 개척했던 이주민.

1860년대 이전에 이미 계절에 따라 거주지를 이동하는 계절이민이 있었는데, 이들은 두만강 주변에서 어업·수렵에 종사하거나 기장·콩·쌀 등을 경작했다. 러시아가 연해주를 획득한 후에도 두만강을 건너 거주하는 조선인들이 많았다. 조선정부는 이를 금지했으나 당시 관북지방에 흉년과 수탈이 계속되자 많은 사람들이 이주했다.

1864년(고종 1)에는 최운실(崔雲實)·양응범(梁應範) 등이 시베리아에 이주해 토지를 개척했고, 1869년에는 이들이 흉작으로 고통받던 조선민 35세대를 입주시켜 자신들이 개척한 토지를 나누어주었다. 1870년에는 다시 96명이, 이듬해에는 70세대 415명이 이주하여 몇 년 뒤에는 조선인 이민 중에서 모스크바 유학생까지 나올 정도였다.

블라디보스토크 지방으로의 이주는 비교적 순조롭게 진행되어 1874년에는 25명이 이주하여 초가 5동을 짓고 개척리라고 이름지었으며, 1년이 안 되어 신한촌(新韓村)이라 개명하고 양옥·학교·교회당 등을 건립했다. 1875년 안병국(安炳國)·김동삼(金東三) 등은 나선촌(羅鮮村)을 개척했으며, 1884년에는 김석우(金錫雨)·김정련(金正連)이 남석동(南石洞)을 건설했다.

조선인의 이주와 개척이 활발했던 이유 중의 하나는 조선인의 자유로운 입주를 허용했던 1884년 6월의 경흥개척조약의 체결이었다. 한일합병 후에는 일제 식민통치의 압제를 피하거나 또는 민족해방운동을 위한 근거지로서의 이민이 더욱 증가하여, 1920년대 당시 이 지역의 조선인 이민수는 20만~30만 명에 이를 정도였다. 이중 북부 조선인들은 주로 두만강을 건넜으며, 남부 조선인들은 배를 타고 블라디보스토크에 상륙했다.

이들 조선인들을 근간으로 시베리아 지방에서의 민족해방운동이 전개되었다. 1910년 미국에 있는 국민회와의 연락을 목적으로 이강(李剛)·정재관(鄭在寬)·박공육(朴公六) 등이 시베리아 국민회를 조직하여 치타에 본부를 두고 활동했다. 1912년에는 이범윤(李範允)을 중심으로 권업회가 조직되어 조선인의 산업과 상업기업의 설립, 학교와 도서관의 설치, 신문·잡지의 출판 등을 통해 반일사상 고취에 힘썼다.

1914년에는 이상설(李相卨)·이동휘(李東輝) 등이 대한광복군정부(大韓光復軍政府)라는 독립군 조직을 만들어 군사활동을 준비하고자 했으나, 러시아 정부의 탄압으로 권업회와 더불어 해산당하고 말았다. 1917년 러시아 혁명 때에는 혁명에 참가했으며, 같은 해 전로한족대표자회의(全露韓族代表者會議)가 열렸고 이것이 발전하여 전로한족회가 되었다.

1919년에는 블라디보스토크 신한촌의 기독교인들이 중심이 되어 시베리아 부인회를 조직하기도 했다. 또한 1919년 한인사회당(후의 고려공산당), 1921년 이르쿠츠크파 공산당 등을 조직하여 사회주의 확산에 큰 역할을 했다. 그뒤 이 지역의 한인들은 1930년대말에 소련당국에 의해 중앙 아시아 지역으로 강제 이주당하는 수난을 겪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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