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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생 | 1757. 5. 30, 영국 런던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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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망 | 1844. 2. 15, 서리 리치먼드 |
국적 | 영국 |
요약 영국의 총리(1801. 3~1804. 5).
강직했으나 상상력이 빈곤하고 융통성없는 보수주의자로 나폴레옹 전쟁에 잘 대처하지 못했으며, 후에 10년 간 내무장관을 지내며 정치적·경제적 불만을 가진 사람들에게 가혹한 조치를 내려 신망을 잃었다.
채텀 백작(윌리엄 大피트)을 치료했던 유명한 내과의사의 아들로 태어나 어렸을 때부터 소(小)피트와 친구로 지냈다. 1784년 하원의원으로 선출되어 1789년 의장이 되었다. 로마 가톨릭교도의 해방을 지지하던 소피트가 국왕 조지 3세와 대립하고 1801년 3월 14일 사임하자 왕은 피트를 대신해 타협을 모르는 국교회 신자였던 그를 총리로 선택했다.
새 정부는 코펜하겐·카이로·알렉산드리아 등지의 전투에서 거둔 영국군의 승리로 큰 덕을 보았으며 프랑스와 아미앵 조약(1802. 3. 27)을 체결해 더욱 인기를 얻었다. 그러나 전쟁이 다시 터지자(1803. 5) 그의 무능이 여실히 드러나 이듬해 피트에게 총리직을 넘겨주었다. 1805년 1월 시드머스 자작이 되었으며, 그뒤 추밀원 의장(1805, 1806~07, 1812)과 국새상서를 지냈다(1806).
리버풀 백작 내각 때 내무장관이 되었는데(1812. 6~1822. 1) 물가상승과 기업도산, 높은 실업률 등의 문제로 전반적인 난국에 직면했다. 제조업자들과 러다이트(공업에 반대해 기계를 파괴한 급진파)의 시위를 분쇄하기 위해 치안판사들의 즉결재판권을 강화했다. 그의 주장에 따라 1817년 인신보호법이 유예되었으며, 국민들의 공공 집회권과 정치전단 배포권을 제한한 강압적인 '1819년의 6개조' 중 4개 조항이 도입되었다. 직위에서 물러난 뒤 남아메리카 공화국들의 독립승인(1824), 가톨릭 해방령(1829), 개정선거법(1832) 등에 반대했으나 뜻을 이루지 못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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