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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생 | 1955. 2. 24. 미국 캘리포니아 주 샌프란시스코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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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망 | 2011. 10. 5. 미국 캘리포니아 주 팰러앨토 |
국적 | 미국 |
요약 애플사의 창업자. 스티브 잡스는 매킨토시 컴퓨터 등 혁신적인 기술과 디자인의 개인용 컴퓨터를 개발해 보급했고, 아이폰을 통해 스마트폰 시대를 이끌었다. 1976년 고등학교 친구 스티브 워즈니악과 애플 사를 설립해서 출시한 세련된 디자인의 컴퓨터 애플 Ⅱ는 즉각적인 성공을 거두었다. 이어 매킨토시 컴퓨터를 개발하는 과정에서 많은 시행착오를 거치다가 퇴진하여 넥스트사를 창업했다. 그는 픽사를 주요한 애니메이션 스튜디오로 키워내 경영 능력을 과시했고, 1996년 후반 파산 위기에 처한 애플이 넥스트사를 인수하면서 다시 애플의 경영자로 복귀했다. 그는 애플의 모든 제품군을 새로 설계하는 등 혁신을 단행하여 2001년 디지털 미디어 플레이어 아이튠즈와 휴대용 MP3 플레이어인 아이팟을 개발했고, 2007년 아이폰을 출시하며 스마트폰의 새 시대를 열었다. 그러나 오랫동안 그를 괴롭혔던 지병이 그를 일선에서 물러나게 했고, 2011년 그의 꿈이었던 애플 신사옥의 착공을 보지 못한 채 숨을 거두었다.
미국 애플사의 창업자이자 최고경영자. 뛰어난 미적 감각과 인간에 대한 이해로 혁신적인 기술과 디자인으로 무장한 개인용 컴퓨터를 개발해서 대중적 인기를 확보했다. 모바일 시대를 맞아 그가 실질적인 수장의 역할을 자임하며 개발한 아이폰과 앱 생태계는 그전까지 아날로그적 상상력에 머물렀던 휴대폰의 영역을 혁명적으로 확장했다.
초기 생애
그는 압둘파타 존 잔달리와 조앤 시블 사이에서 태어났으나, 곧 양부모인 폴 잡스와 클라라 헤고피언 부부에게 입양되었다. 그는 자신을 버린 친부모(그는 친부모를 '생물학적 부모'라고 불렀다)에 대해서 큰 상처를 받았으며, 끝까지 친부모에 대해 냉정을 유지했다. 양부모에게서 어렸을 때 입양 사실을 전해 들었던 그는 초등학교 시절에는 학교를 결석하고 말썽을 부리는 등 통제하기 어려운 아이였다. 몇년 후 그는 학생용 전자기기 키트를 손에 넣었고, 전자제품 조립의 매력에 빠져들게 되었다.
양부모가 입양 서약서에서 반드시 대학을 보낼 것을 약속했기 때문에, 어려운 형편에도 학비를 모아왔다는 것을 알게 된 잡스는 1972년 오리건 주 포틀랜드에 있는 리드 대학교에 입학한 후 1학기만 다니고 학교를 그만두었고, 학교 기숙사에 머물면서 청강을 하거나 여행을 하면서 지냈다. 이 때 청강한 캘리그래피 강의는 잡스가 갖고 있던 미적 감각을 구체적인 대상을 통해 확인하는 데 큰 도움이 되었고, 후일 애플 컴퓨터의 디자인과 폰트를 획기적으로 개선하는 데에도 영감을 주었다.
애플 컴퓨터의 개발
1974년 봄 잡스는 캘리포니아의 집으로 돌아가 게임 회사인 아타리에서 게임의 개발과 관련된 일을 시작했다. 이 무렵 그는 당시 휼릿패커드사에 근무하고 있던 고등학교 친구 스티브 워즈니악을 다시 만났다. 워즈니악은 자신만의 컴퓨터 연산제어장치(로직 보드)를 설계하는 데 있어서 그 진행과정을 잡스에게 얘기했고, 잡스는 둘이 함께 새로운 사업을 시작해 보자고 제안했다. 1976년 휼릿패커드사가 워즈니악이 설계한 것을 공식적으로 거절한 후 그들은 사업을 시작했다. 그들은 잡스의 집 차고를 사무실 삼아 개발한 자신들의 로직 보드를 애플 1라고 이름 붙였다. 재료와 개발에 드는 비용은 잡스의 폭스바겐 미니버스와 워즈니악의 고성능 계산기를 판매한 돈으로 충당했다.
잡스는 개인용 컴퓨터가 대중들에게 광범위한 호응을 얻게 될 것임을 알아차린 최초의 기업가였다. 하지만 최소한 그 기계는 중학교 과학전시회에나 출품될 법한 물건처럼 보이지 않아야 한다는 전제가 요구되었다. 잡스의 격려로 워즈니악은 키보드까지 갖춘 더욱 개선된 모델 애플 Ⅱ를 설계했다. 그리고 그들은 매끄러운 플라스틱 재질로 된 일체형 틀로 전체를 감싸도록 마감하여 외장을 정돈했다. 비록 잡스가 길고 덥수룩한 머리 스타일에 비즈니스 정장 입는 것을 꺼려하기는 했지만, 그는 회사의 재정·유통·홍보에 필요한 채널을 그럭저럭 확보할 수 있었다.
애플 사의 성장
애플컴퓨터는 1977년 주식회사로 전환했다. 애플 Ⅱ라는 이름의 기계는 개인용 컴퓨터의 폭발적 인기와 동일한 의미로 쓰이면서 즉각적인 성공을 거두었다. 1981년 회사는 주식 공모의 신기록을 세웠고, 역사상 최단 시간 내에 〈포춘 (Fortune)〉 지 선정 미국의 500대 기업 진입이라는 놀라운 기록을 1983년에 달성했다. 1983년 회사는 펩시코사의 대표 존 스컬리를 최고경영자로 영입했다.
스컬리는 또한 최첨단 대기업을 경영해야 하는 잡스의 암묵적 멘토의 역할을 겸했다. 잡스는 스컬리에게 애플의 최고경영자 직책을 수락하도록 설득했다. 당시 잡스는 스컬리에게 "남은 일생 동안 설탕물이나 팔면서 살기를 원하십니까, 아니면 세상을 바꾸시겠습니까?"라는 매우 도전적인 질문을 던진 것으로 유명했다. 그 질문은 통찰력이 엿보이는 질문이기도 했지만, 또한 컴퓨터 혁명에 대한 자신의 메시아급 믿음을 드러내는 것이기도 했다.
같은 시기에 잡스는 애플 역사상 가장 중요한 프로젝트를 이끌고 있었다. 1979년 그는 애플의 개발자 몇 명으로 이루어진 소그룹을 이끌고 제록스사의 팰러앨토 연구소(Palo Alto Research Center/PARC)에서 있었던 기술시연에 갔다. 여기에서 그는 그래픽 사용자 인터페이스(graphic user interface/GUI)가 어떻게 컴퓨터 사용을 보다 쉽게 하고 좀 더 효율적으로 만들 수 있는지를 알게 되었다. 그 후 잡스는 업무용 컴퓨터인 리사를 설계하고 있던 개발 팀을 떠나서 좀 더 저가의 컴퓨터를 개발하는 소규모 그룹을 이끌었다.
맥킨토시 컴퓨터의 개발과 잡스의 퇴진
두 종류의 컴퓨터 모두 PARC의 아이디어를 발전시키고 좀 더 세련되게 하기 위해 재설계되었다. 하지만 잡스는 완전히 다른 새로운 컴퓨터로 알려지게 되는 매킨토시 혹은 맥이 인기를 끌게 될 것이라는 확신을 가졌다. 잡스는 개발 직원들의 자유를 존중해 주었고, 그들 각각을 창의적 아이디어로 개발에 기여하는 예술가로 대우했다. 하지만 그의 디자인 감각은 단호하여 협상이라는 것이 없었다.
그는 한때는 내부 회로 보드의 디자인이 매력적이지 않다고 판단하고 그것을 다시 디자인하라고 요구하기도 했다. 후에 그는, 매킨토시는 대충 좋은 것이 아닌 '기가 막히게 훌륭한 컴퓨터여야 한다'는 고집으로 유명해졌다. 1984년 1월 멋지게 기획된 발표회에서 잡스는 직접 매킨토시를 소개했다. 이 발표회는 비범한 홍보 캠페인의 전설이 될 정도의 화려한 행사로 기획되었다. 이것은 나중에 이벤트 마케팅의 전형으로 꼽히게 되었다.
하지만 최초로 출시된 맥은 성능은 많이 떨어지면서 값은 비쌌고, 맥을 위해 개발된 소프트웨어도 거의 없었다. 이런 이유로 인해 맥의 매출 결과는 실망스러웠다. 애플은 꾸준히 기계를 개선했고, 그 결과 매킨토시는 마침내 모든 후속 컴퓨터들을 위한 인터페이스의 전형이 되었을 뿐만 아니라 회사의 주력 상품이 되었다. 하지만 이 문제를 신속하게 바로잡지 못했던 잡스의 명백한 실패는 회사 내에서의 긴장으로 이어졌다. 1985년 스컬리는 이사회를 설득하여 애플의 공동 창립자이자 저명인사인 잡스를 몰아냈다.
넥스트 설립과 픽사의 성공
잡스는 퇴사하자마자 퇴직하면서 받은 지분으로 넥스트사를 창업했다. 이 회사는 교육시장을 타깃으로 한 강력한 워크스테이션 컴퓨터 설계를 하는 곳이었다. 그의 회사에는 텍사스 기업가 로스 페로와 일본의 전자회사인 캐논사가 투자 파트너로 참여했다. 넥스트 컴퓨터는 공학 디자인 면에서는 주목할 만한 것이었지만, 선마이크로시스템스사와 같은 경쟁업체들과의 가격 경쟁에서는 밀리고 있었다. 1990년대 초반 잡스는 혁신적인 소프트웨어 시스템인 넥스트스텝에 회사의 역량을 집중했다. 그 후 10년에 걸쳐 잡스는 픽사를 주요한 애니메이션 스튜디오로 키워냈다.
이 스튜디오의 여러 성과 중에서도 특히 1995년에 제작된 애니메이션 영화 〈토이 스토리(Toy Story)〉의 제작은 주목할 만한 성공이었다. 이 영화는 장편영화로는 처음으로 영화 전체를 컴퓨터그래픽만으로 완성시킨 것이었다. 또한 1995년 픽사의 주식 공개로 인해 잡스는 처음으로 억만장자 대열에 합류했다. 한편 1996년 후반 막대한 재정 적자와 파산 위기에 처한 애플은 반도체 부문 이사 길버트 아멜리오를 새로운 최고경영자로 기용했다.
애플사로 복귀
아멜리오는, 애플이 집중적으로 오랜 연구 노력을 기울였음에도 매킨토시의 낙후된 운용체제를 대체할 만한 만족스러운 제품을 개발하는 데 실패했다는 것을 알았을 때 다음 순서로 넥스트를 선택했다. 아멜리오는 잡스의 이 회사를 4억 달러가 넘는 비용을 지불하여 매입했고, 잡스를 다시 애플의 고문으로 데려왔다. 하지만 애플 이사회는 회사의 재무상태를 개선시키는 과정에서 드러난 아멜리오의 무능력에 곧 환멸을 느끼게 되었고, 1997년 6월 애플의 돌아온 공동 설립자에게 회사를 다시 이끌어달라고 요청했다.
잡스는 신속하게 옛날 원수지간이었던 마이크로소프트사와 제휴했으며, 아멜리오의 맥-클론 협정을 폐기했다. 그와 동시에 회사의 생산 라인을 단순화했다. 그는 또한 잠재 고객들에게 '다르게 생각하고' 매킨토시를 구입하도록 부추기는 광고를 제작했으며, 이 광고는 광고상을 수상했다. 그는 애플사로 돌아오면서 임원들이 제시하는 많은 제안을 거절해야 했다. 그는 마이크로소프트의 윈도스 운영체제로 운영되는 컴퓨터를 만들자는 제안을 거부했고, 애플을 소프트웨어만을 개발하는 회사로 분리하자는 일부의 강력한 주장에도 따르지 않았다. 잡스는 자체 운영체제를 가진 유일한 개인용 컴퓨터 주요 제조업체로서의 애플이야말로 혁신을 위한 고유한 위치를 갖고 있다는 것을 믿었다.
혁신의 아이콘
그는 혁신을 단행했다. 1998년 잡스는 달걀 모양의 일체형 컴퓨터인 아이맥을 선보였다. 아이맥은 상대적으로 적절한 가격에 고속의 처리속도를 지녔고, 패션 감각을 살린 컴퓨터 트렌드를 만들어냈다. 후속 모델들은 각기 다른 5가지의 밝은 색상으로 주목을 받았다. 그해 말까지 아이맥은 미국에서 가장 많은 판매량을 기록한 개인용 컴퓨터가 되었고, 잡스는 한때 퇴색해가던 회사의 지속적 이익을 발표할 수 있게 되었다. 그 이듬해 그는 멋진 디자인의 아이북과 G4로 다시 한 번 대성공을 거두었다. 아이북은 젊은 층의 마음을 사로잡은 대표적인 휴대용 컴퓨터로 자리 잡았고, G4은 슈퍼컴퓨터로서의 성능을 갖추었기 때문에 어떤 작업을 하더라도 정보를 다른 시스템으로 이출(移出)할 필요가 없는, 애플이 자랑하는 강력한 데스크톱 컴퓨터였다.
아이팟과 아이튠즈
그러나 애플은 과거에 누렸던 컴퓨터업계에서의 패권을 되찾지는 못했다. 하지만 스티브 잡스는 회사를 구했고, 그 과정에서 최첨단 기술 분야의 최고의 마케터이자 비전을 제시하는 사업가로서의 명성을 재정립했다. 2001년 잡스는 21세기를 맞이하여 애플을 재창조하기 시작했다. 그해는 애플이 아이튠즈를 선보였던 해이다. 아이튠즈는 음악을 실행시키고 음악을 MP3 형식으로 전환하는 일종의 컴퓨터 프로그램이다. MP3는 컴퓨터와 다른 디지털 기기에서 일반적으로 널리 사용되는 디지털 포맷이다.
같은 해 후반 애플은 휴대용 MP3 플레이어인 아이팟을 판매하기 시작했다. 이것은 매우 짧은 기간에 시장을 이끄는 제품이 되었다. 2003년 애플은 인터넷을 통해 대형 음반사가 발매한 곡들을 다운로드가 가능한 MP3 형식으로 판매하기 시작했다. 2006년까지 애플의 아이튠즈 스토어 온라인을 통해 10억 개가 넘는 곡과 비디오가 판매되었다. 회사 사업 영역에서의 변화를 인식하면서 잡스는 2007년 1월 9일 사명을 애플사로 변경했다.
아이폰 출시
2007년 잡스는 터치 스크린의 아이폰 출시와 함께 통신사업을 회사의 사업영역에 추가했다. 아이폰은 MP3를 듣고 비디오 시청이 가능하며, 인터넷에 접속할 수 있는 기능을 갖춘 휴대폰이었다. 그해 후반 애플은 아이팟 터치를 선보였다. 이것은 와이파이(WiFi)가 내장되어 있고 아이폰과 유사한 터치 스크린을 갖춘 MP3 플레이어이자 게임기기이다. 애플과 외부 업체가 개발한 소프트웨어를 판매하는 아이튠즈 스토어를 이용함으로써 강력해진 아이폰과 아이팟 터치는 곧 어느 다른 휴대용 게임 시스템보다 훨씬 많은 게임들을 갖추게 되었다.
2008년 잡스는 앞으로 출시될 아이폰과 아이팟 터치 버전은 개선된 게임 기능성을 제공하게 될 것이라고 발표했다. 컴퓨터가 업무용 기계로 진지하게 받아들여지지 않을 것이라는 우려 때문에 회사 초창기 애플은 게임 개발자들을 지원하지 않았었다. 하지만 이제 애플은 역설적이게도 통신사업 진출과 함께 게임산업에서 더욱 역할이 커질 것이라고 주장하고 있다.
췌장암 발병과 죽음
2003년 잡스는 희귀한 췌장암 진단을 받았다. 그는 9개월가량 수술을 연기하면서 수술 이외의 다른 약물 치료법을 시도했다. 2004년 그는 휘플 수술이라고 알려진 대규모 수술을 받았다. 수술 과정에서 췌장 및 담관의 일부, 담낭, 십이지장을 절제하고 남은 췌장과 담관을 직접 위에 붙여 연결했다. 그리고 위장 내분비물이 위로 직접 가도록 재연결했다. 잠시 나아진 잡스는 애플 경영에 복귀했다.
하지만 2008년 내내 잡스는 눈에 띄게 체중이 줄었고, 이로 인해 암이 재발했다는 무시하기 어려운 추측들이 난무했다. 휘플 수술을 받은 환자의 평균 5년 생존율은 단지 20%에 불과했다. 2009년 1월 9일 잡스는 호르몬 불균형 때문에 고생하고 있으며 그것 때문에 치료를 받고 있고, 회사에서의 자신의 임무는 계속할 것이라는 성명을 발표했다. 하지만 그로부터 일주일도 못 되어 그는 건강 회복을 위해 6월말까지 병가를 낼 것이라고 발표했다. 비록 잠시나마 회사를 떠나게 되면서, 잡스는 자신의 건강 문제는 사적인 것이어서 보다 상세하게 밝히는 것은 거절한다는 이전 입장을 고수했다.
2009년 6월 〈월 스트리트 저널 Wall Street Journal〉은 잡스가 그해 4월에 간 이식 수술을 받았었다고 보도했다. 그가 이전에 치료받았던 췌장의 암이 간으로 전이된 것인지의 여부는 밝혀지지 않았다. 이식 수술은 테네시에서 이루어졌다. 미국에서 간 이식을 위해 기다려야 하는 기간은 평균 306일이지만 테네시에서는 그보다 훨씬 짧은 48일이면 가능했다. 잡스는 2009년 6월 29일에 애플로 다시 복귀하여 6월 말 이전에 복귀할 것이라는 약속을 지켰다. 하지만 2011년 1월 잡스는 다시 한 번 병가를 냈다. 8월에는 최고경영자를 사임하고 회장으로 일선에서 물러났으며, 10월 5일에 결국 췌장암으로 사망했다.
잡스의 은퇴 후, 애플사의 운영은 팀 쿡 최고경영책임자가 맡았다. 사망하기 직전이었던 2011년 6월에 그는 애플사의 신사옥 건설 계획에 애정을 갖고 쿠퍼티노 시의회에서 프리젠테이션을 했었는데, 결국 잡스는 이 사옥 공사의 착공을 보지 못하고 세상을 떠났다. 잡스가 생존해 있을 때의 인터뷰를 포함한 자료로 엮은 월터 아이작슨의 <스티브 잡스(Steave Jobs)>가 2011년 10월 24일 출간되었다. 이어 이 자료를 바탕으로 조슈아 마이클 스턴이 연출하고 애쉬튼 커쳐가 주연한 영화 <잡스(Jobs)>가 2013년 공개되었다. 2015년에는 월터 아이작슨의 책에 좀더 충실한 대니 보일 연출, 마이클 패스벤더 주연의 <스티브 잡스>가 개봉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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