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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생 | 1149경, 페로 제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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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망 | 1202. 3. 9, 노르웨이 베르겐 |
국적 | 노르웨이 |
요약
노르웨이의 왕(1177~1202 재위).
(영). Sigurdsson Sverrir.
노르웨이 중세 역사에서 가장 유명한 인물인 그는 왕권을 확대하고 교회의 특권을 제한해 민중봉기를 불러일으켰으며, 이 봉기는 1217년에야 진압되었다.
페로 제도 출신 남자와 군힐이라는 노르웨이 여자 사이에 태어난 스베레는 어린 나이에 성직자로 임명되었다. 그러나 어머니한테서 그의 친아버지가 노르웨이 국왕이었던 시구르 2세라는 이야기를 들은 뒤, 그는 왕위를 요구하기 위해 노르웨이로 갔다(1174). 1177년에 이미 그는 당시의 통치자인 망누스 5세에 대항하는 비르클레크스족의 지도자가 되어 있었다. 뛰어난 군사 지도자인 스베레는 트론헤임 지역에서 자신이 노르웨이 왕이라고 선언한 뒤, 1179년에 망누스의 군대를 철저히 무찔렀다.
1184년 망누스가 스베레의 군대와 싸우다가 참패하고 전사하자 스베레는 노르웨이의 유일한 왕이 되었다. 스베레는 망누스 5세를 지지하다가 망명한 대주교 에위스테인 에를렌손이 1183년 노르웨이로 돌아오자 그와 화해했다. 그러나 스베레는 왕이 주교 선출권을 가져야 한다고 주장했고 대주교가 개인적으로 양성하고 있는 무장병력을 줄이라고 요구했기 때문에, 에위스테인의 후계자인 에리크 이바르손과 사이가 나빠졌다. 이바르손은 스베레에게 왕관을 씌워주기를 거부하고 1190년 노르웨이의 많은 주교들과 함께 덴마크로 달아났다. 뒤에 남은 주교들이 1194년 스베레에게 왕관을 씌워주었지만, 교황 인노켄티우스 3세는 그후 이들을 파문했다. 스베레는 교황의 비난과 파문에 대해 '주교에 반대하는 연설'로 응수했는데, 당시 이것은 교권보다 왕권이 우월해야 한다는 것을 가장 명쾌하게 주장한 글이었다.
1196년 국왕에 반대하는 오슬로 주교 니콜라스 아르네손이 망명한 에리크 이바르손 대주교와 합세해 함대를 이끌고 노르웨이로 돌아왔다. 그러자 스베레의 교회 및 행정 개혁에 반대하는 종교 및 세속의 지도자들이 여기에 용기를 얻어 반란을 일으켰다. 니콜라스는 노르웨이 동부지역을 대부분 장악했고, 노동 계층의 지지를 얻었으며, 스베레가 장악하고 있는 내륙지역으로 진격하겠다고 위협했지만 1199년 잇따라 참패당했다.
1202년까지 스베레는 반란군을 완전히 물리쳤지만 내전은 그가 죽은 뒤에도 계속되었다. 그의 뒤를 이어 노르웨이 왕위에 오른 그의 아들 호콘 3세는 교회와 화해했지만 2년 뒤인 1204년 에 죽었다. 스베레의 생애에 대한 이야기는 아이슬란드의 설화 〈스베레 이야기 Sverris saga〉에 담겨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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