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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르기우스 1세

다른 표기 언어 Sergius I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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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생 미상
사망 638. 12. 9, 콘스탄티노플(지금의 터키 이스탄불)
국적 콘스탄티노플

요약 그리스 정교회 신학자, 콘스탄티노플의 총대주교(610~638 재위).

콘스탄티노플 총대주교를 역임한 사람 가운데 가장 영향력 있고 독립성을 유지한 인물이다. 그는 황제 헤라클리우스(610~641 재위)를 도와 페르시아와 아바르의 침략자들을 무찔러 동로마 제국을 지켰고, 그리스도론 논쟁 과정에서 동방 그리스도교계의 교리를 통일시키려고 타협적인 신조를 만들었으나 나중에는 비정통적이라는 비판을 받았다.

622~628년의 전투에서 헤라클리우스에게 도덕적인 명분을 세워주고 교회 재정을 기증하여 그를 도왔고, 황제가 변방에서 페르시아인들과 전쟁을 치르는 동안 섭정 역할을 맡아 동·서에서 콘스탄티노플을 공격해오는 적에 대해 비잔틴의 저항을 부추겼다.

종교 문제에서(특히 그리스도론과 관련하여) 정통교리에 반대하는 단성론자들과 칼케돈 공의회(451)의 정통 교령을 따르는 자들을 화해시키는 일에 진력했다. 그러나 그리스도의 본성은 신적인 것이지 인간적인 것이 아니라고 주장하는 단성론자들은 세르기우스가 그리스도의 기능적 인간성 교리를 계속 주장한다는 이유로 그의 개입을 적극 반대했다.

633년경 세르기우스는 그의 단일 에네르기 이론(그리스도는 2가지 본성을 가지고 있지만, 그것은 하나의 작용 또는 에네르기라는 이론)에 대해 헤라클리우스로부터 인정을 받았다. 헤라클리우스는 그뒤 세르기우스의 교리를 비잔틴 제국 전역에 확산시키라는 명령을 내렸다. 세르기우스는 한 걸음 더 나아가 633년경 이집트의 알렉산드리아 총대주교인 키루스의 지지를 얻어냈다. 세르기우스의 단일 에네르기 이론은 처음에는 교황 호노리우스 1세(625~638 재위)로부터 승인을 받았으나 예루살렘 총대주교 소프로니우스가 주도하는 거센 반대에 부딪혔고, 나중에는 제3차 콘스탄티노플 공의회(680/681)에서 라틴 교회와 그리스 교회 모두로부터 단호히 거부당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세르기우스는 타협적인 해결을 모색하면서 638년 단의론 교리를 마련했다. 이것은 그리스도가 신성과 인성을 모두 갖고 있지만 의지는 신적 의지만을 갖고 있다는 교리로, 헤라클리우스 황제의 칙령 〈Ecthesis〉에 실렸다. 그러나 그해 단성론자와 정통주의자 모두로부터 비난을 받았으며, 라틴 교회는 649년 로마 공의회에서 단의론을 이단으로 선언했다. 그렇지만 세르기우스의 행동은 비잔틴 교회와 황제가 협력한 상징이며, 교황청에 대한 콘스탄티노플 총대주교의 자치권을 시사한 것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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