백과사전 상세 본문
요약 상감기법으로 문양을 시문한 청자.
상감기법은 세계 각지에서 기원을 전후로 하여 목칠·금속공예품·유리공예품 등에 사용된 시문기법으로 일반화되어 있던 것이지만, 자기질 청자에 유약을 입히기 전에 시문한 것은 고려시대에 창안된 독자적인 기법이다.
상감청자는 상형된 기명의 표면에 우선 문양을 음각하고 그 부분을 태토의 성분과 유사한 백토니나 자토니로 메운 다음 표면 위로 넘친 백토와 자토를 제거하면 음각으로 파여진 부분에 백토의 색과 자토의 흑색이 남아 의도했던 문양이 나타난다. 그후에 1차 번조를 하고 유약을 씌운 다음 2차 번조를 하면 상감청자가 완성된다. 따라서 청자는 표면에 두께의 차이가 생기거나 문양이 탈락되는 경우가 없다.
발생기의 상감청자
상감청자의 발생시기를 추정하는 데 있어서 북송의 사신으로 1123년 고려에 왔던 서긍(徐兢)의 〈선화봉사고려도경 宣化奉使高麗圖經〉에 비색청자(翡色靑磁)에 관한 기록은 있지만 상감청자에 관한 기록은 없고, 인종(仁宗:1123~46 재위)의 장릉(長陵)에서 출토된 청자류 중에 상감청자가 없는 것으로 보아 12세기 전반까지는 상감기법이 발생되지 않았다고 생각해왔다.
그러므로 가장 시대가 앞서는 편년자료인 문공유(文公裕:1159 죽음)묘에서 출토된 청자상감보상당초문완(靑磁象嵌寶相唐草紋盌:국보 제115호)을 발생기의 것으로 보고 12세기 중반에 상감기법이 발생했다고 추정했던 것이 종래의 학설이었다. 그러나 1980년대 이후에 진행된 청자요지의 조사에서 상감기법의 발생시기를 재고할 만한 자료가 발견되고 있다. 경기도 용인군 이동면 서리 고려백자 요지의 퇴적층에서 10세 기의 특징을 보이는 층위(層位)에서 12세기의 전형적인 상감문양과는 다르지만 백자와 청자 의 표면에 흑토나 백토로 상감한 예가 발견되었고, 전라남도 함평군 손불면 양재리에 있는 10세기 후반부터 11세기 전반의 청자요지에서 흑상감이 확인되었다. 또 10세기 후반에서 11세기 전반 사이에 철화청자(鐵畵靑磁)와 녹청자(綠靑磁)의 생산지인 전라남도 해남군 산이면 진산리요지에서 흑상감이 발견되었고, 상감청자의 최대생산지인 전라남도 강진군 대구면에서도 11세기의 양식적 특징을 갖는 청자요지에서 흑·백상감이 채집되고 있다. 그리고 북한의 고려 왕릉 발굴조사에서 경종(景宗:976~981 재위)의 영릉과 문종의 경릉에서 상감청자대접이 출토되었다고 한다. 이러한 자료를 통해 종래 12세기 중반으로 추정했던 상감청자의 발생시기를 10세기 후반에서 11세기 전반으로 편년할 수 있게 되었다.
발생기의 시리·양재리·진산리, 대구면요지에서 발견된 상감문양은 시문의 솜씨가 정교하지 못하고 문양의 배치도 공예의장화되지 않은 초보적인 단계를 보이며 문양 소재도 특수한 것으로 고려상감청자의 전형적인 것과는 크게 다르다. 특히 초기 상감이 시문된 기종이 병(甁)이나 장고(長鼓)와 같은 입체적인 대형기명에 제한되고, 백상감보다는 흑상감 중심으로 시문되고 있어서 이러한 현상을 상감기법 발생기의 특징으로 볼 수 있다.
발전기의 상감청자
상감기법의 발전기는 음양각기법이 세련되고 유태(釉胎)의 색이 비색에 도달하는 11세기 후반에 해당된다. 대부분의 양질 청자에는 음양각기법이 시문되고 흑백퇴화문(黑白堆花紋) 기법과 철화(鐵畵) 기법 등이 사용되었으나, 상감 기법은 실험단계로서 발생기에 흑상감을 중심으로 소량 제작되었던 것으로 생각된다. 계축년(癸丑年:1013 또는 1073)에 제작된 청자상감문자명발(靑磁象嵌文字銘鉢:국립중앙박물관 소장)은 외면에 흑상감으로 '계축년조상대성지발'(癸丑年造上大聖持鉢)이라는 문자를 새겨 넣었다.
유태는 담녹갈색(淡綠褐色)으로 조질이지만 흑상감은 선명하게 기법적 완성도를 보여준다. 상감기법은 세련기에도 시문기법으로 높은 비중을 차지하지 않았다. 문양 자체가 두드러지지 않는 음양각기법은 유태와 서로 조화를 이루고 있으며, 흑백으로 나타나는 상감기법은 당시로도 파격적인 표현방법이었으리라고 생각된다. 따라서 세련기에 들어선 상감기법은 양질 청자 음양각문양의 주변에 작은 비중을 차지하는 종속문양의 형태로 나타나기 시작한다. 특히 종전에는 대형기면이나 특수기종에 나타났지만 보편적인 완(盌)과 대접에도 나타나기 시작한다. 청자음각연당초상감국화절지문대접(靑磁陰刻蓮唐草象嵌菊花折枝紋大楪:보물 제1032호)은 유태가 양질이며 투명하고 내면에 3송이의 연당초무늬를 채워 음각하고, 상감기법으로 외면의 3곳에 작은 국화절지를 새겨넣었는데 문양의 비중은 음각문보다 작다. 청자양각연당초상감시명표형병(靑磁陽刻蓮唐草象嵌詩銘瓢形甁:국립중앙박물관 소장)도 전면에 양각으로 연당초무늬를 시문한 다음 능화형을 구획하고 서명을 흑상감했다. 이러한 양상은 12세기 중엽까지 계속되었다. 전라남도 강진군 사당리 7호요지 발굴조사에서 〈고려사〉 세가(世家) 의종 11년(1157)조에 기록된 청자와(靑磁瓦)와 함께 음양각이 시문된 대접의 종속문으로 상감이 새겨진 예가 발견되었다. 이 상감문은 기법적으로 완성되고, 문양은 주문양(主紋樣)이 아닌 종속문양에 지나지 않지만 전형적인 고려상감청자의 문양 소재와는 큰 차이가 없다.
12세기 중엽에서 후반 사이에는 상감문이 주문양으로 등장하면서 12세기 전반에 시작된 내외면을 모두 시문하는 경향이 자리잡아가고 문양의 비중이 커진다. 음양각문 중심에서 상감문 중심으로 변모하면서 음양각문은 종속문양으로 자리를 바꾸게 된다. 문공유의 묘에서 출토된 청자상감보상당초문완은 상감 중심으로 변모한 예이다.
내면의 상감문양 소재는 음양 각무늬와 같은 소재이며 형태도 큰 차이가 없다. 구연부 아래에 당초문대가 돌려지고 측면에는 보상화당초무늬가 역상감(逆象嵌)되고, 내저에 큼직한 국화판문이 새겨져 있다. 외면에는 단순한 구름무늬와 당초문대가 백상감되어 있으며 3곳에 비중이 작은 국화절지문이 흑백 상감되어 있다. 음각문은 저부에 연판문대를 작게 돌렸을 뿐이다.
전성기의 상감청자
12세기 후반부터 13세기 후반까지는 상감청자의 전성기로서 현존하는 대부분의 양질 상감청자는 이 시기에 제작된 것이다. 이 기간 동안 상감청자는 공예의장 화한 문양 소재에서 회화적인 소재로 변모한다. 명종(1131~1202)의 지릉에서 출토된 청자류 중에 청자상감여지문대접은 내외면이 모두 상감기법으로 되어 있으며 기이(1269)라는 간지가 새겨진 청자상감간지명대접 등이 이 시기에 속한다.
14세기부터 상감청자는 조질화되어갔지만 한편으로는 다량생산되었다. 정해(1347)명청자와 지정(1341~67)명청자는 조질화되어가는 상감청자의 모습을 보여주며 특히 공민왕비(?~1365)의 정릉명상감청자대접에서 쇠퇴기의 상감청자의 모습을 볼 수 있다. 한국 청자의 조형미에서 12세기까지 음양각 중심의 비색청자가 맑고 조용한 불교적 이상세계의 아름다움이라고 한다면 상감청자는 밝고 명랑한 현실세계의 아름다움이라고 할 수 있다.
이러한 상감청자의 기술적 전통은 조선시대 상감분청사기와 상감백자로 계승되어 15세기까지 한국도자의 특징적인 장식기법으로 중요한 위치를 차지했다.
본 콘텐츠의 저작권은 저자 또는 제공처에 있으며, 이를 무단으로 이용하는 경우 저작권법에 따라 법적 책임을 질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