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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3인

다른 표기 언어 三十三人 동의어 민족대표 33인, 民族代表三十三人

요약 민족대표는 각 교파별로 천도교측에서는 손병희를 비롯한 15명이, 기독교측에서는 이승훈을 비롯한 16명이, 불교측 대표로서는 한용운을 비롯한 2명이 서명·날인했다. 독립선언의 방법을 구상한 송진우·현상윤·최린·최남선 등은 처음에 천도교·기독교측 인물, 구한말의 유지를 대표로 할 계획이었으나 구한말 유지들은 참여를 거부했고 불교측이 참여하게 되었다. 독립선언에 서명한 33명 외에 운동의 기획자들을 포함하면 모두 48명이다. 이들은 독립선언을 기획했을 뿐만 아니라, 〈독립선언서〉를 배포하고 전국 시위를 촉발하는 하나의 계기를 마련했지만 당일 태화관에 별도로 모여 일본 경찰에 통고하는 것으로 끝났다. 이로써 33인의 역할은 중단되었고, 이후의 운동은 민중 스스로가 조직하고 추진했다.

민족대표라고도 한다.

민족대표는 각 교파별로 선정되었다. 천도교측에서는 손병희(孫秉熙)·권동진(權東鎭)·오세창(吳世昌)·임예환(林禮煥)·나인협(羅仁協)·홍기조(洪基兆)·박준승(朴準承)·양한묵·권병덕(權秉悳)·김완규(金完圭)·나용환(羅龍煥)·이종훈(李鍾勳)·홍병기(洪秉箕)·이종일(李鍾一)·최린(崔麟)의 15명이, 기독교측에서는 이승훈·박희도(朴熙道)·이갑성(李甲成)·오화영(吳華英)·최성모(崔聖模)·이필주(李弼柱)·김창준(金昌俊)·신석구(申錫九)·박동완(朴東完)·신홍식(申洪植)·양전백(梁甸伯)·이명룡(李明龍)·길선주·유여대(劉如大)·김병조(金秉祚)·정춘수(鄭春洙)의 16명이, 불교측 대표로서는 한용운(韓龍雲)과 백용성(白龍成)의 2명이 서명·날인했다. 독립선언의 방법을 구상한 송진우·현상윤·최린·최남선 등은 처음에 천도교·기독교측 인물, 구한말의 유지를 조선민족대표로 하여 그 이름으로 독립을 선언하고 〈독립이유서〉를 각국에 보낼 계획이었으나 구한말 유지들은 참여를 거부했다. 그러나 독립선언 준비를 알게 된 불교측이 참여하게 되어 3교단이 주축이 되었다. 독립선언에 서명한 33명 외에 운동의 기획자들을 포함하면 모두 48명이다.

권동진(權東鎭)

ⓒ Nichetas/wikipedia | Public Domain

이들은 독립선언을 기획했을 뿐만 아니라, 〈독립선언서〉를 배포하고 인맥을 통해서 서울과 북부지방은 물론 3월 중순 이래의 남부지역에서 시위를 촉발하는 하나의 계기를 마련해주었다. 그러나 33인 자신은 파고다 공원(지금의 탑골공원)에서 독립선언서를 낭독한다는 학생대표자들과의 사전 합의를 어기고, 명월관지점 태화관에 별도로 모여 일본 경찰에 통고했다.

삼일독립선언서(三一獨立宣言書)

조선이 주권을 가진 독립국임을 선언한 문서로 1919년 3월 1일의 3·1 운동 때 민족대표 33인이 독립을 선언한 글이다.

ⓒ 민족 대표 33인/wikipedia | Public Domain

이로써 33인의 역할은 중단되었고, 이후의 운동은 민중 스스로가 조직하고 추진했다. 현재 33인이 3·1운동에서 어떠한 역할을 했는가에 대해서는 학계에서 3가지 견해로 나누어져 있다. ① 33인이 3·1운동을 지도했다고 보는 견해, ② 33인은 3·1독립선언 발표 이후에는 운동을 포기했으며 오히려 운동의 발전에 장애가 되었다는 견해, ③ 3·1운동의 초기에는 33인이 지도성을 발휘했으며, 후기에는 민중들이 33인이 남겨준 불씨를 넘겨받아 대중운동 차원으로 발전시켰다는 절충적인 견해가 있다.→ 삼일독립선언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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