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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생 | 1811. 3. 10, 일본 시나노 구니[信濃國] 마쓰시로[松代]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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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망 | 1864. 8. 2, 교토[京都] |
국적 | 일본 |
요약 일찍이 일본의 서구화를 주창한 인물.
사쿠마 쇼잔이라고도 한다. 본명은 사쿠마 구니타다[國忠]. 그가 내건 '동양의 윤리와 서양의 과학'이라는 슬로건은 19세기 후반 일본의 근대화 과정의 토대가 되었다.
다재다능한 그의 제자 요시다 쇼인[吉田松陰]을 통해 널리 알려진 사쿠마의 사상은 일본에 남아 있던 봉건주의 잔재를 일소하고 덴노에게 권력을 반환한 1868년의 메이지 유신[明治維新]에 커다란 영향을 미쳤다.
사쿠마는 전통적인 유교 교육을 받은 후 쇼군[將軍]의 고문단 일원인 사나다 유키쓰라[眞田幸貫]의 고문이 되어 두터운 신임을 받았다. 그러나 서구의 과학·기술을 받아들여야 한다는 그의 주장이 바쿠후[幕府]의 오랑캐를 물리치고자 하는 양이 정책과 불협화음을 일으킴으로써 그는 사나다와 함께 사임을 강요당했다.
사쿠마는 네덜란드어를 비롯하여 서양 학문 연구에 몰두했는데, 당시 일본은 서구 여러 나라 중에서 유일하게 네덜란드와 접촉하고 있었다. 무기를 주조하고 유리를 만드는 기법을 익힌 그는 고향인 마쓰시로에서 군사부문과 농업을 개선·향상시키는 데 힘썼다. 그의 이러한 시도가 성공함으로써 제자가 많이 늘어났는데 그중에는 뒤에 메이지 신정부에서 주요한 역할을 한 사람이 많았다.
1854년 사쿠마는 서구에 관해 더 많은 지식을 얻기 위한 노력의 일환으로 문하생인 요시다로 하여금 미국 해군제독 매튜 C.페리의 함선에 몰래 승선하도록 했다. 당시 페리 제독은 일본으로 하여금 문호를 열고 외국과 교류를 하라는 압력을 가하고 있었다. 요시다가 붙잡힘으로써 그와 사쿠마는 감옥에 갇혔지만 사형은 모면할 수 있었다. 1년이 못 되어 사쿠마는 풀려나 그의 일족의 보호감시를 받게 되었다.
1858년 미일수호통상조약이 체결되자 그는 새로운 '개국' 정책의 강력한 주창자가 되었다. 한편 미일수호통상조약이 일본의 전통에 어긋난다고 생각한 사람들이 바쿠후를 전복시키고 덴노에게 권력을 되돌려주자는 운동을 벌이기 시작했다. 이러한 국내 분열은 위험한 결과만을 초래할 뿐이라고 여긴 그는 바쿠후와 덴노 사이의 원만한 관계를 유지하기 위한 임무를 수행하려고 애썼으나 국수주의적인 사무라이들에 의해 암살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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