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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생 | 1822, 오스만 제국 카이로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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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망 | 1863. 1. 18, 알렉산드리아 |
국적 | 이집트 |
요약 오스만 제국의 이집트 부왕(1854~63 재위).
사적(私的) 토지소유권을 확대하고 이집트 시크(sheikh:村長)들의 영향력을 감소시키는 정책을 폈다.
무하마드 알리 파샤 부왕의 넷째 아들인 사이드는 파리에서 공부했고 1854년 아바스 1세로부터 이집트 부왕직을 이어받았다. 그는 유럽의 토지소유제도에 마음이 끌린데다가 서구 자본가들로부터 이집트의 전통적인 토지소유제도를 변경하라는 압력을 받아 1855년 농민이 남자 자손에게 토지를 상속할 수 있도록 하는 법률을 제정했다.
3년 뒤에는 이슬람교도에 대한 토지 상속을 제한함으로써 상속받는 친척집단의 범위를 상당히 줄이는 또다른 법률을 통과시켰다. 당시에는 극소수의 농민들만이 토지를 소유하고 있어 법률 적용에 한계가 있었으므로, 2번째로 제정된 법률에는 토지를 5년 동안 계속 소유하고 토지세를 낸 농민은 영구토지소유권과 토지를 팔고 저당잡히거나 교환할 수 있는 권리를 갖는다고 규정했다.
이러한 농민들의 재산권 확대는 상대적으로 시크들의 권위를 줄이는 결과를 낳았다. 즉 이들은 농민들이 사망하는 경우를 비롯해 토지소유관계에 변화가 생길 때 농민들에게 토지를 분배할 수 있는 권리를 잃게 되었다.
사이드는 마을이 세금납부에 대해 집단적인 책임을 지고 시크들이 농민들에게 세금을 분담시키던 관습을 폐지하고 경작자 개인에게 직접 세금을 부과했다. 또한 시크들이 소유하고 있던 토지 일부를 몰수했으며, 그때까지 군역 의무가 면제되었던 시크들의 아들을 군대에 징집했다.
사이드는 다른 분야의 개혁도 시도했다. 1861년 그는 이집트 도시들의 규약을 만들 위원회를 구성했으나 외국세력의 반대에 부딪쳐 아무 성과도 얻지 못했다. 또한 수단에서 노예를 수입하는 것을 금지함으로써 노예무역이 성행하는 것을 막으려 했으나 역시 실패로 돌아갔다.
그가 취한 조처 중 가장 눈에 띄는 것은 1856년 수에즈 운하 건설권을 프랑스 회사에게 허가한 것이다. 그러나 1859년 사이드와 오스만 군주가 그 계획에 반대하게 되었고 따라서 사이드의 남은 임기 동안에 운하 건설은 당국의 허가 없이 진행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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