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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생 | 882, 이집트 알파이윰 딜라즈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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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망 | 942. 9, 바빌로니아 수라 |
국적 | 유대 |
요약
유대인 성서주석가·철학자·논쟁가.
(아). Sa⁽īd Ibn Yūsuf al-Fayyūmī.
유대인의 문학활동과 자치활동에 미친 영향으로 당시 매우 중요한 유대인 학자였다.
그의 독특한 재능은 921년 바빌로니아에서 벌어진 유대 달력 계산법에 관한 논쟁에서 유감없이 드러났다. 935년 수라에서 최대의 철학저작 〈믿음과 견해 Kitāb al-amānāt wa al-i⁽tigādāt〉를 내놓았다. 〈구약성서〉를 아랍어로 옮긴 그의 번역서는 성서를 해석하는 데 대단히 귀중하다(유대교).
사디아의 어린시절에 관해서는 알려진 것이 거의 없다.
23세 때 아내와 아들 2명 및 그를 따르던 뛰어난 제자들을 남겨둔 채 이집트를 떠났다. 그무렵 사디아는 이미 히브리어-아랍어 사전을 완성했는데, 이 사전은 그뒤 〈하에그론 ha-Egron〉이라는 제목으로 증보판이 나왔다. 팔레스타인으로 이주해 카라파 공동체의 성장을 목격했는데, 카라파는 〈탈무드〉(율법·전승지식·성서주석을 모은 권위있는 랍비 해설서)를 거부하는 이단 유대교파였다(카라임 운동). 이 파는 팔레스타인 이슬람교 지도자들의 지원을 받고 있었다.
사디아는 팔레스타인에서 성서의 이해 수준에 실망한 것으로 보인다.
그뒤 그는 다시 바빌로니아로 떠났는데, 그곳에서 카라 분파뿐 아니라 모든 일신교를 뿌리째 거부하는 영지주의(靈智主義) 경향(고대의 이원론적·신지학적 운동에서 파생)을 생생하게 목격했다. 당시에는 페르시아의 유대교 이단파인 히위알 발히의 책 등이 유행하고 있었는데, 이 책들은 성서에서 말하는 신의 전능·전지·정의를 부인하고 성서의 일관성없는 점들을 지적했다. 이러한 도전에 맞서 사디아는 종교 전체와 특별히 유대교 전통을 옹호하는 데 뛰어난 재능을 발휘했다.
사디아는 히위와 똑같은 방식을 채택하여 다소 복잡한 운문체 히브리어로 히위를 반박하는 글을 썼다. 또 〈아난에 대한 반론 Kitāb ar-radd ⁽alā ⁽Anān〉(아난은 카라파의 창시자)도 썼다. 이 책은 없어졌지만 현재 단편으로 남아 있는 그의 논쟁시 〈에사 메살리 Essa meshali〉가 이 책의 일부임이 확인되었다.
학자로서 명성을 얻고 있던 사디아는 921년 팔레스타인 학자 아론 벤 메이르와의 논쟁에서 바빌로니아 유대인 학자들을 대표했다.
아론은 크게 바뀐 유대 달력 계산법을 발표했다. 논쟁은 어느 쪽도 뚜렷한 승리를 거두지 못하고 끝났다. 그러나 사디아는 그 논쟁에 참가함으로써 불굴의 용기와 바빌로니아의 유대인 공동체에서 그가 차지하는 중요성을 입증했다. 이 기간 동안 카라파에 반대하는 논쟁적인 글도 계속 썼다. 928년 전통적인 랍비 달력을 옹호하는 〈분별 Kitāb attamyῑz〉 을 완성했다.
같은 해 5월 22일 그는 에크실라르크(바빌로니아에 포로로 잡혀간 유대인의 지도자) 다윗 벤 자카이에 의해 당시 바그다드로 옮긴 수라 아카데미의 가온(원장)으로 임명되었다. 사디아는 이 직책을 맡으면서 〈탈무드〉의 율법을 체계화하고 〈탈무드〉를 정경(正經)으로 만들 필요가 있음을 깨달았다. 이를 위해 〈전승 율법 Kitāb al-mawārῑth〉·〈신탁 율법 Aḥkam al-wadi⁽ah〉·〈십계와 증언 Kitāb ash-shahādah wa al-wathā⁾iq〉·〈금단의 음식 Kitāb aṭ-ṭerefot〉, 주기도문과 관련 율법을 완벽하게 정리한 〈시두르 Siddur〉 등과 그밖의 부수적인 저작 몇 편을 썼다.
〈시두르〉에는 그가 창작한 종교시도 포함되어 있다. 위의 책들은 그리스-아랍의 분류·저술 방법을 뚜렷하게 보여준다.
이러한 업적으로 그는 우월감이 강해졌고 더욱 고집세고 비타협적인 인물이 되었다. 그리고 이러한 태도 때문에 그는 친구를 잃기도 했고 벤 자카이의 질시를 받았다. 932년 사디아는 벤 자카이가 율법회의에서 내린 결정을 승인하지 않았으며 이 일로 두 지도자는 공공연히 반목하게 되었다.
벤 자카이가 사디아를 파문하자 그 보복으로 사디아도 벤 자카이를 파문했다. 두 진영이 각각 정치적 영향력이 있는 바그다드의 유대인 부자들의 지원을 받아 3년 동안 치열한 싸움을 한 결과, 벤 자카이가 이슬람교 지도자의 도움으로 사디아를 원장직에서 내쫓는 데 성공했다. 사디아는 속세를 멀리 떠나 지냈다. 그뒤 사디아의 문필 경력에서 가장 눈부신 시기가 왔다. 이 시기에 그는 철학 주저 〈믿음과 견해〉를 완성했다. 이 저서의 목표는 계시와 이성을 조화시키는 것이었다.
구성과 내용면에서 이 저서는 그리스 철학과 합리주의적 이슬람교 분파인 무타질라파(派) 신학의 영향을 뚜렷하게 보여준다. 서문에서 그는 회의론을 거부하고 인간 인식의 기초를 세운다. 제1장에서는 창조주 신의 존재를 확인하기 위해 '무로부터의 창조'(creatio ex nihilo)라는 명제를 증명하려 한다. 그 다음으로 신의 유일성·정의·계시·자유의지 등을 이야기하고 유대교와 무타질라파(신의 유일성과 절대적 정의 교리를 강조한 이슬람교 최대의 사변신학 분파)가 모두 받아들이는 그밖의 교리에 관해 이야기한다.
2부에서는 영혼의 본질과 종말론 문제를 다루고 도덕적 삶의 지침을 제시한다. 937년 벤 자카이와 화해하여 사디아는 가온으로 복직했다. 940년 벤 자카이가 죽고 7개월 뒤 그의 아들도 어린 자식을 남기고 죽자 사디아는 이 고아를 집으로 데려와 자기 자식처럼 키웠다. 사디아는 942년 9월에 죽었다.
저작
사디아 저작들의 정확한 연대는 알 수 없다. 이중 문헌학에서 중요한 저작은 〈문법 Kutub al-lughah〉(솔로몬 스코스가 단편을 모아 출판함)·〈단 한 번 기록에 남아 있는 어구 70개에 대한 해설 Tafsῑr as-sab⁽ῑn lafzah〉(N. 알로니가 단편을 편집함) 등이다. 사디아의 걸작은 성서주석에 관한 것이었다. '펜타튜크'의 아랍어 번역판을 준비했고(요세프 데렌부르크가 출판함), 〈창세기〉 1~28장, 〈출애굽기〉, 〈레위기〉에 대한 방대한 주석이 붙은 번역판도 준비했다. 〈이사야〉·〈잠언〉·〈욥기〉·〈시편〉등의 번역판은 현재 완전하게 남아 있다. 〈다니엘〉·〈아가〉·〈에스델〉·〈애가〉에 대한 주석서의 단편들은 게니자 수집품(카이로에 있는 오래된 유대교 회당에서 발견되어 여러 도서관에 옮겨져 있는 중세 원전의 단편들) 속에 수록되어 있다. 성서를 주석하면서 사디아는 그리스어-아랍어 수사법을 모델로 삼은 새로운 번역 원칙을 만들었다.
카라파에 반대하는 저작으로는 〈이븐 사카와이히에 대한 반론 Kitāb ar-radd ⁽alā Ibn Sākawayhῑ〉과 〈불합리한 율법의 뿌리 Kitāb taḥṣ ῑl ash-sharā⁾i⁽ as-samā⁽ ῑyah〉가 있다. 〈불합리한 율법의 뿌리〉에서 사디아는 모세 율법의 불합리한 계율과 관련된 문제는 유추가 아니라 구전된 규정에 의해서만 해결할 수 있다고 주장했다. 따라서 탈무드 전통은 없어서는 안 된다는 것이 그의 결론이었다. 카라파에 반대하는 또하나의 저작은 〈안식일의 빛에 관한 연구 Maqālah fῑ sirāj as-sabt〉이다. 이 책에서는 안식일을 위해 빛을 준비하는 것을 금지하는 카라파의 계율을 반박했다. 철학 분야에서는 신비주의 계열의 책인 〈세페르 예트지라 Sefer yetzira〉에 대해 철학적으로 주석한 책을 썼다. 〈믿음과 견해〉와는 달리 이 책은 칼람(이슬람 스콜라주의 신학)의 영향을 전혀 찾아볼 수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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