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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생 | 1350, 리투아니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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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망 | 1430. 10. 27, 리투아니아 트라카이 |
국적 | 리투아니아 |
요약
리투아니아의 민족지도자.
(영). Vytautas the Great. (폴). Witold Wielki.
조국의 영토를 통합하고 민족의식이 싹트는 것을 도왔으며 튜튼 기사단을 몰아냈다. 폴란드에 대해서도 큰 영향력을 행사했다. 비타우투스는 리투아니아 지배권을 둘러싸고 형제인 알기르다스와 몇 년 간 권력투쟁을 벌인 켕스투티스의 아들이었다. 이 두 가족 간의 권력 싸움은 다음 세대에도 이어져 비타우투스는 알기르다스의 아들 요가일라와 패권을 다투었다.
1382년 켕스투티스 부자는 요가일라에게 사로잡혔는데 켕스투티스는 감옥에서 살해되고 비타우투스는 그곳에서 탈출하여 2년 뒤에 요가일라와 화해했다. 이때 요가일라는 비타우투스에게 그 전에 빼앗은 영지를 돌려주었다. 자기의 지위를 공고히 하고 세력을 확장하기 위해 요가일라는 12세 된 폴란드 여왕 야드비가와 결혼했고 1386년 2월 15일 부아디수아프 2세 야기에우오로 폴란드 왕위에 올랐다. 그뒤 비타우투스는 요가일라와 이따금씩 권력투쟁을 벌였고 그럴 때 이따금씩 튜튼 기사단에 지원을 요청했다.
비타우투스의 인기가 계속 높아지자 요가일라는 타협의 자세를 취할 수밖에 없었다. 그는 비타우투스에게 리투아니아 전역에 대한 자신의 부섭정이 될 것을 제안했다. 이 제안을 받아들인 비타우투스는 1392년 8월 공식적인 협정을 맺었는데 시간이 지나면서 합법적이진 않았지만 리투아니아의 실질적인 최고 지도자가 되었다. 통치 초기에 그는 반역적이고 무능한 귀족들을 제압하고 추방했다. 이후 동부의 몽골족들을 정복하려 했으나 1399년 8월 12일 지금의 우크라이나 영토인 보르스클라 강 전투에서 몽골군에게 대패했다(→ 보르스클라 강 전투).
1401년 1월 빌니우스에서 체결된 한 조약에서 폴란드와 리투아니아 사이의 연합이 공포되었다(→ 빌뉴스 조약). 이 조약에 따라 리투아니아의 보야르들은 비타우투스가 죽을 경우 요가일라를 리투아니아 대공으로 인정할 것을 약속했고, 폴란드 귀족들은 요가일라가 죽는다면 비타우투스의 동의 없이는 새 왕을 선출하지 않겠다는 데 동의했다. 그후 비타우투스와 요가일라는 서쪽으로 관심을 돌려 요가일라의 형제인 스비트리가일라(스비드리기에우오)를 리투아니아 대공으로 인정했던 튜튼 기사단과 몇 차례 전쟁을 치렀다.
비타우투스는 스비트리가일라를 몰아낼 수는 있었으나 튜튼 기사단이 리투아니아 일부 지역을 계속 장악해 나갔다. 1409년 초 튜튼 기사단을 연합 공격하기 위해 요가일라와 조약을 체결하고 1410년 6월 24일 폴란드-리투아니아 연합군이 프로이센 변경을 넘어섰다. 1410년 7월 15일 그룬발트(타넨베르크) 전투에서 튜튼 기사단은 만회하기 어려운 타격을 입었다. 이로써 발트 해 지역에 대한 독일의 주도권이 무너졌고 폴란드-리투아니아는 서방에서 강국으로 인정받기 시작했다. 1429년 비타우투스는 다시 리투아니아 왕위를 요구했고 요가일라가 마지못해 이에 동의했으나 대관식이 거행되기 전 비타우투스는 죽고 말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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