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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생 | 1754. 1. 15, 프랑스 샤르트르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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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망 | 1793. 10. 31, 파리 |
국적 | 프랑스 |
요약 프랑스 혁명기의 정치지도자.
급진민주주의적인 자코뱅당에 반대한 부르주아 온건파인 지롱드당(흔히 브리소파라고도 부름)을 이끌었다(→ 지롱드당).
간이식당 주인의 아들로 샤르트르에서 법률사무소 서기로 사회생활의 첫발을 내디뎠고 곧 파리로 일자리를 옮겼다. 과학에 관심을 가지고 있던 그는 런던에 가서(1783. 2~11) 문학작품을 출판하는 한편 과학 분야의 정기간행물을 2종류 창간했으나 실패했다.
프랑스로 돌아와 왕비와 정부를 비판하는 소책자를 낸 죄로 바스티유 감옥에 투옥되었다가 1784년 9월 석방되었다. 영국의 노예제 폐지운동에서 영감을 얻어 1788년 2월 '흑인우애협회'(Société des Amis des Noirs)를 창설했다. 5월에는 미국으로 떠났다가 프랑스에서 삼부회의가 소집되자 돌아와 1789년 5월 〈프랑스의 애국자 Le Patriote franais〉라는 신문을 발간했다. 초대 파리 시의회 의원으로 선출된 그는 바스티유 감옥 습격 때 감옥 열쇠를 전달하는 일을 했다.
루이 16세가 바렌으로 달아난 뒤인 1791년 7월 10일, 그는 자코뱅 당원들에게 한 장시간의 연설에서 국왕의 신성불가침권을 공격했다. 이 연설에는 장래 그의 외교정책의 골자가 모두 담겨 있었다. 입법의회 의원으로 선출된 즉시 외교문제에 관심을 갖고 외교위원회에 참가했다. 그는 전쟁만이 혁명의 적을 드러내고 보편적 자유를 위한 성전을 전개시킴으로써 혁명을 공고히 할 수 있다고 주장했다. 자코뱅당 지도자 막시밀리앙 로베스피에르만이 이 주장에 반대했고 1792년 4월 오스트리아에 전쟁이 선포되었다. 전쟁 초기에 프랑스군의 패배는 오히려 브리소 일당이 억누르고자 했던 혁명운동에 새로운 추진력을 주었다.
군주제를 유지시키기 위해 헛되이 노력을 기울이던 그는 9월 1일 파리 코뮌에서 로베스피에르에 의해 '자유의 살해자'로 탄핵받았다. 더이상 파리에서 인정받지 못하게 되자 그는 외르에루아르의 대표로 국민공회에 진출했다. 1792년 10월 12일 자코뱅당에서 축출당하고 극단적 혁명세력인 산악당의 공격을 받았지만 여전히 외교위원회에서 영향력을 행사했다. 그의 보고에 따라 1793년 2월 1일에는 영국과 네덜란드에까지 선전포고가 확대되었다.
1793년 4월 3일 로베스피에르는 그를 반역자인 샤를 프랑수아 뒤무리에 장군의 친구이며 전쟁의 주된 책임자라고 비난했다. 브리소는 이에 응수해 자코뱅당을 비판하고 파리 시의회 해산을 촉구했다. 그는 4~5월에 벌어졌던 지롱드당과 산악당의 투쟁에서 두드러진 역할을 하지 않았지만 1793년 6월 2일 그와 지롱드당 동료에게 체포령이 떨어졌다. 그는 피신했으나 물랭에서 붙잡혀 파리로 압송되었다. 10월 30일 저녁 혁명재판소에서 사형선고를 받고 다음날 단두대의 이슬로 사라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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