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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생 | 1823경, 미국 뉴욕 레이크조지 근처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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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망 | 1896. 1. 15, 뉴욕 시 |
국적 | 미국 |
요약 미국의 사진작가.
정치인들의 인물사진과 남북전쟁을 찍은 사진들로 19세기에 가장 잘 알려진 미국의 사진작가 중 한 사람이다.
화가이자 발명가인 새뮤얼 F.B.모스에게서 은판(銀板) 사진술을 배워 1844년 뉴욕 시에 자신의 첫 스튜디오를 열었고, 4년 뒤에는 수도 워싱턴 D. C.에, 1854년에는 다시 뉴욕 시에 3번째 스튜디오를 열었다. 1845년 대니얼 웨브스터, 에드거 앨런 포, 제임스 페니모어 쿠퍼 등을 포함해서 가능한 한 당시의 많은 유명 인사들을 다 찍어보려는 계획을 실행하기 시작했다. 그 작업의 규모는 그가 모은 대통령들의 인물사진에서 잘 드러난다.
취임 후 1개월 만에 죽은 윌리엄 헨리 해리슨을 제외하고는 존 퀸시 애덤스부터 윌리엄 매킨리에 이르는 모든 미국 대통령들의 사진을 새로 만들거나 복사·수집했다. 이것은 이미 대단한 명성을 얻고 있던 브래디의 고급스런 스튜디오의 평판을 더욱 높여주었고 〈빛나는 미국인들의 화랑 A Gallery of Illustrious Americans〉(1850)의 출판으로 국내외적으로 더욱 확고한 명성을 떨치게 되었다.
1861년 남북전쟁이 일어나자 그 전투를 완벽하게 기록하기로 결심하고 20명도 넘는 사진가들을 고용했는데, 그들 중 알렉산더 가드너(1821~82), 티모시 H. 오설리번(1840경~82)이 가장 잘 알려져 있다. 그는 직원들을 전장의 전지역으로 급파했고 자신은 주로 워싱턴 사무실에서 사진사들에게 지시를 내리고, 사진관의 운영을 감독했지만, 불런, 애티텀, 게티즈버그 같은 전장의 모습은 브래디 자신이 직접 찍은 것으로 보인다. 또한 그는 전장에서의 링컨과, 1865년 4월 애퍼매턱스에서 자신의 군대를 양도한 직후의 로버트 E. 리의 사진 등 기념할 만한 사진도 찍었다.
남북전쟁을 기록하기 위한 계획으로 브래디는 큰 재정적 타격을 입게 되었다. 그는 정부가 전쟁이 끝난 뒤 그의 사진을 살 것을 확신하고 10만 달러를 투자했으나 정부는 관심을 보이지 않았다. 게다가 조직에서 가장 실력 있는 사진가들은 브래디가 그들의 작품에 대한 공적인 인정을 거부했기 때문에 모두 떠나버렸다. 1873년 재정적 위기로 뉴욕 시의 스튜디오를 팔아야만 했고 파산하게 되었다. 사진원판들의 창고보관료도 지불할 수 없었으며, 결국 육군성이 그 음화들을 공매를 통해 2,840달러에 샀다. 1875년 마침내 정부기관에 있던 친구들의 노력으로 의회로부터 2만 5,000달러를 받았으나 재정상태는 다시 회복되지 못해 알코올 중독자가 되어 자선병동의 한 병실에서 세인에게 잊혀진 채 쓸쓸한 임종을 맞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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