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브라이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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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생 1811. 11. 16, 잉글랜드 랭커셔 로치데일
사망 1889. 3. 27, 로치데일
국적 영국

요약 영국의 개혁정치가·연설가.

빅토리아 시대 초기에 자유무역 옹호 및 저곡가운동(그는 반곡물법 연맹의 공동발기인이었음), 의회개혁운동에 활발히 참여했다.

자수성가한 면방직공장 소유주였던 제이콥 브라이트의 살아 남은 첫째 아들로, 아버지의 무뚝뚝함과 어머니의 상상력 풍부한 감수성을 물려받았다.

브라이트가(家)는 퀘이커교도였다. 북부 잉글랜드의 퀘이커 학교들에서 교육을 받았다. 이들 학교에서 고전 교육을 받는 대신 성서와 17세기 영국 청교도 시인들(특히 밀턴)에 대한 애정을 키웠으며 평생 간직한 이같은 애정은 그의 연설에서 종종 드러나곤 했다. 퀘이커 신앙은 수많은 개인과 민족 사이에 존재하는 사회적·정치적·종교적 불평등을 종식시키는 것을 요구한 그의 정치철학의 토대가 되었다.

이미 20대에 그는 고향에서 영국국교회를 위해 강제세 납부를 거부하는 운동을 이끌어 성공을 거두었다. 같은 취지에서 그는 저곡가를 위해 투쟁하는 반곡물법 연맹의 발기인 겸 회원이 되었고 1841년에 이르러 그는 동맹의 지도자인 리처드 코브던의 으뜸가는 지지연사로 두각을 나타냈다. 1846년 곡물법이 폐지될 때까지 5년 동안 두 사람은 전국 곳곳의 연단에서 함께 연설했다. 코브던은 연설에서 설득력있는 논거를 제시했고, 브라이트는 의회를 곡물법 통과 수단으로 이용한 농촌 대지주들의 정치적 특권을 공격하는 데 집중했다.

코브던은 브라이트에게 자유무역의 도덕적·경제적 정당성을 가르쳤으나 브라이트는 좀더 범위를 좁혀서, 곡물법 폐지에 공동 이해관계를 갖는 제조업자와 공장노동자들을 대변해 발언하는 경향이 있었다.

브라이트는 1843년 더럼과 1847년 맨체스터에서 의회의원으로 선출되었다. 1839년 그는 같은 퀘이커교도인 엘리자베스 프리스트먼과 결혼했으나 그녀는 딸 하나를 남기고 1841년 9월 폐병으로 죽었다. 말년이 되어 그는 자신이 상처한 이후 코브던이 찾아와 함께 곡물법 철폐운동을 벌이기로 맹세했던 감동적인 일들을 즐겨 이야기했다.

그러나 브라이트의 해묵은 회고는 무의식적으로 자신을 과장하고 더 큰 효과를 노린 나머지 정확성이 결여되곤 했다. 실제로는 부인이 죽기 훨씬 전부터 코브던과 긴밀하게 일을 시작했다. 또한 그는 설사 코브던이라 하더라도 반대의견을 제기하는 것을 지극히 싫어했다. 이는 그의 예민한 본성에서 비롯된 불행으로서, 그는 종종 다른 사람의 감정이 상할 만큼 퉁명스럽게 자신의 실망감을 표현하곤 했다.

1847년 브라이트는 재혼했다.

2번째 부인은 역시 퀘이커교도인 마거릿 엘리자베스 리덤으로서 그녀의 남자 형제 둘은 나중에 자유당 의회 의원이 되었다. 그녀도 역시 정치에 관심을 가졌으나 브라이트는 이같은 관심을 권장하지 않았다. 확실히 그는 자기 가족 중의 여성들이 '여권'에 관해 논하는 것을 달가워 하지 않았다. 브라이트에게는 4명의 아들과 3명의 딸이 있었는데 그는 아버지로서 애정과 지배가 공존하는 전형적인 빅토리아 시대의 가부장적 태도를 견지했다. 나이가 들면서 브라이트는 심지어 구약시대의 족장 같은 풍모를 띠기도 했는데 이 특이한 풍모는 그의 연설에 효과를 더해주었다.

전성기였던 1850, 1860년대에 브라이트의 연설은 신문·잡지를 통해 널리 알려졌으며 심지어는 적대자들로부터도 칭찬을 들었다.

그는 자신의 연설능력을 하느님의 선물이라 여기고 연단에 선 자신을 설교단에 선 성직자에 비견했다. 그가 한 일련의 연설 가운데 가장 걸작은 바로 이같은 취지에서 영국의 크림 전쟁 개입을 반대한 연설이었다. 그는 크림 전쟁이 비(非)그리스도교적이며 국제자유무역의 원칙에 어긋나고 영국의 이익에도 해롭다는 점을 다각도로 밝히면서 전쟁을 비판했다.

그는 이렇게 말했다. "죽음의 천사가 전세계를 뒤덮고 있습니다. 이제 여러분은 그 날개치는 소리를 듣게 될 것입니다." 그는 파머스턴 경과 귀족들이 영국 국민을 기만하고 있다고 비난했다. 그의 표현에 따르면, 영국의 외교정책과 많은 경비가 드는 외교관 파견은 "귀족계층을 위한 방대한 야외 휴양지 체계"를 이루고 있었다.

전쟁을 막지 못했다는 좌절감으로 브라이트는 1856~58년 심한 신경쇠약에 빠졌다.

또한 그의 반전주의는 1857년 맨체스터의 의석을 잃는 한 요인이 되었으나 그는 몇 개월 후 버밍엄 선거구에서 하원의원으로 선출되어 나머지 생애 동안 이 지역의 대표자로 있었다. 1858년말 버밍엄에서 브라이트가 시작한 의회개혁을 위한 강연운동은 몇 개월 만에 중단되었으나 이 운동은 1860년대 중반에 벌어진 대개혁운동의 출발점이 되었다.

1866년 하반기에 브라이트는 갑작스럽게 영웅으로 부각되고 개혁운동가들의 첫째가는 대변자로 인정받기에 이르렀다.

보통선거를 요구하는 사람이나 제한된 개혁을 바라는 사람 모두가 그를 인정했다. 직접적인 영향력을 볼 때 이 시기는 그의 생애에서 절정기였다. 역설적이게도 자신의 입장을 세밀하게 밝히지 않은 것이 오히려 그의 입장을 강화했다. 그는 항상 세부적인 내용과 자세한 논리는 1865년에 죽은 코브던에게 맡겼다. 그러나 브라이트는 1867년 선거법 개정안에 호주 선거권이 도입되는 것으로 만족했는데, 이 법안은 도시 숙련기술자들에게까지 투표권을 확대했지만 여전히 도시와 농촌의 일반 노동자들을 제외한 것이었다.

그는 기술자들의 지적 능력과 자립성에 감명을 받고 누구든 투표권을 원하는 사람은 그같은 자질을 갖추도록 권유했다. 브라이트 집안은 마음씨 좋은 고용주들이었지만 이처럼 자립과 자조를 강조하는 입장 때문에 결국 공장입법·노동조합·사회개혁에 반대하는 제조업자들의 앞장에 서게 되었다. 이 점이 브라이트가 가진 평등사상의 부정적인 측면이었다. 긍정적인 측면에서 그는 미국 남북전쟁(1861~65) 당시 남부 노예 소유주들에 반대하여 강력하게 북부를 지지했고 인도의 세포이 항쟁(1857)을 전후해서는 영국이 인도를 덜 권위주의적인 방식으로 통치하도록 압력을 넣었다.

그는 1868년 상무장관으로 윌리엄 글래드스턴의 내각에 들어갔으나 또다시 신경쇠약에 걸려 1870년 사임해야 했다.

그뒤에도 2차례 더(1873~74, 1880~82) 글래드스턴 내각에서 재직했으나 나머지 생애는 단지 이전 시기의 마무리에 불과했다. 그의 급진주의는 더이상 위험시되지 않았고 마지막 20년의 생애 동안 그는 많은 사람들에게 (경제학자이며 언론인인 월터 배젓이 말했듯이) '위대한 명사'로 인정받았다. 그는 1870, 1881년에 글래드스턴의 아일랜드 토지개혁 추진을 도왔으나 항상, 심지어는 평화를 옹호할 때도 강하게 표출된 전투적인 기질 때문에 1886년에는 글래드스턴이 아일랜드 자치법안을 밀고나가는 것에 반대했다.

그는 의회정치를 우롱하는 아일랜드 민족주의자들에게 권력을 부여하는 것은 결코 용납할 수 없다고 선언했다. 브라이트는 노년이 되어 커다란 찬양과 존경을 받았으나 후대 역사가들은 그의 성품과 업적을 좀더 비판적으로 보는 경향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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