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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89년을 전체적으로 볼 때 제6공화국 정부 당국의 북방정책은 초기에 다소 우여곡절을 겪었지만 괄목할 만한 성과를 거둔 것은 확실하며, 이같은 정책목표가 궁극적으로는 대북한 개방압력에 있다는 것이 일반적인 평가이다.
사회주의권과 남북한 관계에 급속한 진전이 이루어졌을 때 미국과 일본 등 전통적 우방과의 관계소홀 문제가 일부 제기되기도 했었다. 정부가 추진했던 현실적인 북방정책은 중국·소련·동구에 대한 부분과 북한에 대한 것으로 구분·추진되었으며, 상호접근 형태 또는 접촉 성과도 크게 차이가 있었다.
즉 북한에 대해서는 '7·7선언'에도 나타난 바와 같이 화해와 개방을 유도하는 정책을 지양하고 대화를 통한 동반자 관계를 수립하겠다는 의지를 표명하고 있지만, 북한의 태도 변화로 실질적인 내용은 선언과 달리 별다른 진전이 없었다. 반면 중국·소련·동구국가들과는 경제협력을 초점으로 한 관계개선이 과감하고도 빠른 속도로 진전되었다. 따라서 1989년 북방정책의 성과는 내적으로 제6공화국 정부의 정책성과로 나타남으로써 6공화국 정부의 지위를 강화시켜주는 효과를 나타냈다.
1990년의 북방정책은 그간의 성과와 일정 정도의 자신감을 바탕으로 중국·소련과의 관계개선과 국교수립이라는 정책적 목표를 수행하기 위해 상대적으로 일관성있게 추진되었다.
이러한 요인은 다음과 같은 국내외적인 조건에 근거한 결과에서 비롯되었다. 우선 국제적으로 사회주의권의 개혁·개방과 맞물리면서 동구의 개방화 현상이 자본주의의 승리로 표현된 조건에서 상당한 자신감을 부여받았다. 즉 사회주의권에서 급속확산된 개혁과 개방이 정부의 북방정책에 만족할 만한 성과를 제공했던 것이다.
또한 국내적으로는 동구 사회주의 국가와 소련·중국과의 국교수립이라는 북방정책의 성과는 그 실리적인 측면을 떠나 외교관계의 측면에서도 노태우 대통령의 정치적인 업적으로 평가되면서 정부의 지위를 강화시켜주는 효과를 가져왔다. 이상의 2가지 국내외적인 조건에 근거하여 중소와의 관계개선과 이를 통한 북한의 개방화 압력이라는 과제를 중심으로 전개되었다. 이는 사회주의권과의 수교가 모두 북한의 고립에 직접적·간접적으로 영향을 미치고 있으며, 또한 이들을 통해 북한에 개방화 압력을 가했기 때문이다.
이러한 단적인 예가 1990년 9월 전격적으로 이루어진 한·소 수교이다.
결과적으로 1990년 북방정책을 통해 북한과 강력한 동맹체제를 구축하고 있던 사회주의 국가들과의 관계를 개선·확대함으로써 외교적 측면에서 커다란 성과를 획득할 수 있었다. 그러나 더욱 중요한 측면은 북한이 1989년 들어 급진전된 동구권의 위기와 사회주의권의 해체경향으로 말미암아 체제방어와 외교적 고립화의 탈피라는 서로 상반된 두 과제로 난경에 처하고 있는 사이 남한의 북방정책이 북한의 개방을 더욱 가속화시켰다는 점이다.
그러므로 북방정책은 동구권과의 수교, 한소 정상회담과 모스크바 선언에 이은 국교수립, 중국과의 국교수립 등의 성과와 아울러 사회주의권의 교역을 증대시켰다는 경제적인 측면, 1991년 남북한의 유엔 가입이 북한에 대한 외교적 승리라는 측면에서 평가할 만한 정책효과를 이루었다고 볼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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