백과사전 상세 본문
요약 조선 순조 때 창작된 향악정재(鄕樂呈才)의 하나.
1828년(순조 28) 〈진작의궤 進爵儀軌〉 부편(附編)에 전한다. 1829년 2월 진찬(進饌)에서 악장이 없는 여령정재(女伶呈才)로 추어졌다. 같은 해 6월 진찬에서는 보상반(寶相盤)이라 하여 익종(翼宗) 예제(睿製)의 악장을 노래하는 무동정재(舞童呈才)로 추어졌다. 헌종과 고종 때는 잔치에서 빠짐없이 추어졌으며, 1923년 3월 순종의 50회 탄신연과 1930년 7월 영친왕 내외의 귀국잔치에서도 추어졌다.
보상무는 봉화(奉花) 1명, 봉필(奉筆) 1명, 무원(舞員) 6명으로 구성된다. 보상반이라는 둥근 상을 중앙에 놓고 봉화와 봉필이 동서로 나누어 서며, 무원 6명은 2명씩 짝지어 3대(隊)로 나누어 선다. 함령지곡(咸寧之曲)을 연주하면 무원 6명은 앞으로 나가 염수족도하고 선다. 음악이 그치면 창사(唱詞)를 부른다. 다시 함령지곡을 연주하면 3대가 뒤로 물러섰다가 2·3대는 손을 여미며 선다. 1대는 앞으로 나가 무릎을 꿇고 앉아 팔수무(八手舞)를 추며 채구(彩毬)를 가지고 논다. 두 손으로 공을 집어 일어서고 양팔을 들어 읍형(揖形)을 지으면 음악이 그치고, 창사를 부른다. 다시 함령지곡을 연주하면 마주보고 춤을 추다가 좌대(左隊)가 먼저 공을 보상반 가운데로 던진다. 공이 보상반 안에 들어가면 북쪽을 향해 꿇어앉고 봉화로부터 꽃을 받는다. 이때 그 대열은 모두 꿇어앉는다. 만일 들어가지 않으면 북쪽을 향하여 서고 봉필이 뺨에 먹물로 점을 찍는다. 우대(右隊)도 좌대와 똑같이 하고 물러나와 대열의 맨 뒤에 선다. 2·3대도 똑같은 순서에 의해 춤춘다. 무원 모두가 앞으로 나갔다 물러나면 음악이 멈추고 퇴장한다. 이상은 1920년대의 무의이며, 〈정재무도홀기 呈才舞圖笏記〉에 의하면 음악으로는 향당교주(鄕唐交奏)에 임시로 곡을 붙인 태령지곡(泰寧之曲)이 쓰였다고 한다. 보상무는 고려 때부터 전하는 포구락(抛毬樂)을 모방한 일종의 유희무(遊戱舞)이다.
본 콘텐츠의 저작권은 저자 또는 제공처에 있으며, 이를 무단으로 이용하는 경우 저작권법에 따라 법적 책임을 질 수 있습니다.
조선과 같은 주제의 항목을 볼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