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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약 이탈리아의 귀족가문.
원래 시에나 출신으로 13세기에 행정관·외교관·관직으로 진출해 처음으로 명성을 얻었다. 16세기에 로마로 옮겨왔으며 이곳에서 카밀로가 교황 바오로 5세로 선출(1605)됨에 따라 부귀와 명성을 떨치게 되었다.
이 가문의 초창기 인물 가운데 갈가노는 나폴리 주재 교황청 대사(1456)였고, 피에트로는 교황 레오 10세(1513~21)에 의해서 1516년 원로원 의원으로 임명되었으며, 잠바티스타는 교황 클레멘스 7세(1523~34)의 유명한 변론가였다.
로마로 이주하기 시작한 사람은 후에 바오로 5세가 된 카밀로 보르게세의 아버지인 마르칸토니오(1504~74)였다. 바오로 5세는 조카인 스치피오네 카파렐리(1576~1633)를 추기경에 임명하고 보르게세 가문의 일원으로 맞아들이는 등 자기 가문 사람들에게 특권을 베풀었다. 스치피오네는 가문의 재산과 영향력을 늘려가면서 교회정치에서 주도적인 역할을 수행했다. 그러나 그의 주요관심사는 예술을 장려하는 것이었으며 이를 위해 많은 시간과 재산을 바쳤다.
그중에서도 가장 중요한 것은 젊은 예술가 잔 로렌초 베르니니(1598~1680)의 재능을 발견하고 후원해준 일인데, 베르니니는 나중에 이탈리아 바로크 예술의 뛰어난 조각가이자 건축가가 되었다. 스치피오네는 자신이 맡고 있던 여러 종교직책을 통해 거두어들인 막대한 수입으로 로마 시에 있는 많은 교회와 궁전을 복구하고 건설하는 일에 재정적인 지원을 했다. 그의 주요업적은 로마에 보르게세 가문의 저택을 짓고 그곳에 진귀한 그림·조각을 모아 진열한 것이었다.
교황 바오로 5세는 또한 보르게세 가문에서 지금까지 이어져내려오는 분가의 선조이며 이 가문의 재산을 늘려놓은 자신의 조카 마르칸토니오 2세(1601~58)를 도와주었다. 마르칸토니오에게 중요한 술모나 공국을 확보해주었으며 그를 비바로의 제후로 삼았다. 마르칸토니오는 카밀라 오르시니와 결혼(1619)함으로써 권세가인 오르시니 가문의 영지도 획득했으며, 자신의 아들인 파올로(1646 죽음)와 알도브란디니 가문의 상속녀인 올림피아의 결혼을 주선했다.
이밖에 시에나에서 유명했던 이 가문 출신의 성직자는 추기경 피에트로 마리아(1600경~42), 프란체스코(1697~1759), 스치피오네(1734~82) 등이었다. 얼마 뒤에 마르칸토니오 3세는 나폴리의 총독이 되었고, 그의 조카 마르칸토니오 4세(1730~1800)는 예술을 후원하는 이 가문의 전통을 이어갔으며 보르게세 저택을 개조했다. 그는 또한 유명한 재력가 마리아 살비아티와 결혼해서 가문의 재산을 늘려놓았다.
19세기에 카밀로 필리포 루도비코(1775~1832)는 프랑스이탈리아 관계 정립에 중요한 역할을 했다. 나폴레옹의 누이동생인 마리 폴린과 결혼(1803)함으로써 장군으로 승진했고 피에몬테 지방장관(1807)에 임명되었다. 나폴레옹이 퇴위한 후 그는 오스트리아군에게 항복하기로 결정하고 정권 교체시기에 질서유지를 담당했다. 카밀로는 나폴레옹에게 보르게세가의 막대한 예술소장품을 팔아넘김으로써 심한 비난을 받았는데, 그중 일부를 1815년에 회수했다. 카밀로의 동생인 프란체스코(1776~1839)는 뒤에 장군이 되었다. 프란체스코의 손자들 세대에 이르러 가문은 2개로 갈라졌다.
파올로(1845~1920)가 이끄는 분가는 보르게세라는 이름을 계속 가지고 있었고 줄리오(1847~1914)를 중심으로 한 분가는 토를로니아라는 이름을 취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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