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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생 | 1910. 4. 4, 프랑스령 적도(赤道) 아프리카 보방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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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망 | 1959. 3. 29, 방귀 근처 |
국적 | 중앙 아프리카 공화국 |
요약 중앙 아프리카 공화국(이전의 우방기 샤리)의 주요한 민족주의 지도자.
독립을 달성하는 시기였던 1950년대에 활동했다. 그는 프랑스령 적도 아프리카의 4개 식민지의 어느 정치적 지도자도 대적할 수 없는 강력한 대중적 지지를 가지고 있었다. 강력한 반식민주의자이면서도 실용주의자인 그는 자신의 목표를 달성하기 위해 식민지 정부와 유럽 사업가들과 '거래'할 수 있었고 실제로 거래했다.
농가에서 태어난 보간다는 우방기 샤리에서 아프리카인으로는 최초로 로마 가톨릭 신부가 되었다.
그는 가톨릭 선교단의 지원을 받아 1946년 11월 프랑스 하원의원 선거에 출마해 정부가 지원하는 후보를 물리치고 당선되었다. 그러나 그는 곧 식민지 정부 뿐만 아니라 가톨릭 선교단을 비난하면서 프랑스 가톨릭당인 '인민공화운동'을 떠났고 신부직도 버렸다. 1950년경 그는 '아프리카 사회진화운동'이라는 자신의 정당을 창립하고 당을 확고하게 지배했다. 1951년 선거에서 그는 '평화를 파괴했다'는 이유로 프랑스 정부에 의해 잠시 동안 체포되었다.
그이후로 보간다의 지위는 사실상 확고부동했다. 심지어 프랑스 정부는 그와 대립하는 것이 아무런 효과도 없다는 것을 깨닫고 1953년 그를 달래기 위해 그를 새로운 총독으로 임명하기도 했다. 또한 그는 1956년 프랑스 사업가들과 계약을 맺었는데 그들은 도시와 지역 선거명부에 유럽인들을 참가시키는 대가로 그에게 재정적 후원을 제공했다.
국내를 안정시킨 보간다는 1957, 1958년 대체적으로 프랑스령 적도 아프리카(또한 차드, 가봉, 그리고 프랑스령 콩고를 포함함)에 관심을 기울였다.
그는 프랑스에 의한 지배보다는 아프리카인에 의해 이들 국가들이 연합하기를 희망했으며 종국적으로는 앙골라와 벨기에령 콩고(지금의 자이르) 그리고 카메룬까지 포함하는 '라틴아프리카 합중국'을 건설하고자 했다. 그러나 1958년 그의 꿈은 실패로 끝났다. 그는 후에 중앙아프리카 공화국이 된 자신의 나라로 다시 돌아왔고 수개월 후 그곳에서 비행기사고로 죽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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