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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생 | 1782. 3. 14, 미국 노스캐롤라이나 힐스버러 근처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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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망 | 1858. 4. 10, 워싱턴 D. C. |
국적 | 미국 |
요약 미국의 작가, 민주당 지도자.
30년 동안 미주리 출신 상원의원으로 있으면서 농민의 이익과 서부로의 팽창을 옹호했다.
1812년 미·영전쟁에 참전했으며 그뒤 1815년 미주리 주 세인트루이스에 정착하여 〈세인트루이스 인콰이어러 St. Louis Enquirer〉의 편집자(1818~20)가 되었다. 서부도 "이 공화국과 운명을 함께 해야 한다"고 강력히 주장하면서 농민·상인·노예소유주의 이익을 대변했으며, 1820년 상원의원에 당선되어 1851년까지 그 자리에 있었다. 1820년대 중반에 소농민들과 상인들 사이에 지지기반을 만들어가면서 이주민들에게 공유지를 분배하는 운동을 전개했다.
점차로 많은 문제들에 대해 앤드루 잭슨 대통령과 같은 견해를 갖게 되었으며, 곧 상원내 민주당 대변인으로서 인정을 받았다. 1830년대 잭슨이 미국은행을 해체하려 했을 때 의회 내에서 이를 지지하여 잭슨의 시도를 성공으로 이끌었다.
또한 신용없는 주은행들을 경제적으로 건전하지 못한 것으로 여겼으며 연방재정의 독립과 경화정책을 옹호했다. 대체로 노예제지지자, 친남부인사로 여겨졌고, 초기에는 노예제 금지규정 없이 미주리를 주로 인정할 것을 주장했다. 그러나 1840년대에는 노예제가 국가의 성장을 가로막고 연방과 자신의 이상향, 즉 자작농으로 이루어진 국가에 위협이 된다는 이유에서 노예제가 준주로 확대되는 것을 반대했다.
당시 논란이 되고 있던 지역문제에 대해 계속 확고한 노예제 반대입장을 고수했기 때문에 결국 1851년에는 의원직을 잃게 되었지만, 1853~55년 하원에 진출해서 계속 반대운동을 해나갔다. 민주당 내의 많은 노예제 반대론자들과는 달리 새로 창당된 공화당에 가입하지 않았으며 공화당의 대통령 후보로 지명된 그의 사위 존 C. 프리몬트에 반대했다.
자신의 상원시절을 기록한 인상적인 회고록 〈조망 30년 Thirty Years' View〉(2권, 1854~56)은 잭슨 민주주의에 대한 믿음, 노예제 확산에 대한 반대, 위기에 처한 연방제에 대한 염려를 설득력있게 서술하고 있다. 주요저술로는 1858년 대법원이 내린 드레드 스콧 판결(사유재산으로서 노예가 갖는 지위는 연방법률로부터 영향을 받지 않음을 확인했음)에 대한 학술적 저서 〈고찰 Examination〉과 1850년 동안 일어난 의회 내의 논쟁을 다룬 16권의 〈의회내 논쟁의 요약 Abridgement of the Debates of Congress〉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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