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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생 | 1753. 5. 31, 프랑스 리모주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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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망 | 1793. 10. 31, 파리 |
국적 | 프랑스 |
요약 프랑스 혁명 때의 정치가.
온건 지롱드 당원으로서 탁월한 웅변술을 과시했다. 군납품업자의 아들로 파리에서 대학을 다녔고 1781년 보르도 고등법원 변호사가 되었다. 변호사로서 능력이 뛰어났지만 돈이 필요한 경우가 아니면 사건을 맡지 않을 정도로 게으른 사람이었다.
프랑스 혁명이 일어나자 이를 열광적으로 환영했고 1790년 대지주를 상대로 일으킨 폭동에 연루된 어느 군인의 재판에서 변론을 맡아 널리 주목을 끌었다. 1790년 지롱드 주의 행정관으로 뽑혔으며, 파리의 혁명적 국민의회가 프랑스의 봉건제도를 폐지하고 국왕 루이 16세의 절대권력을 제한시킨 조처에 찬성했다. 1791년 10월 1일 국민의회의 뒤를 이은 입법의회에 여러 지롱드 의원과 함께 출석해 뛰어난 웅변으로 오스트리아와의 전쟁을 지지했다.
1792년 4월 20일 전쟁이 선포된 뒤 루이 16세의 반혁명 음모를 폭로하고 왕의 폐위를 제안했다(7. 3). 그러나 그를 비롯한 지롱드당은 맞수인 자코뱅당과는 달리 선거권이 없는 하층계급과 연대하기를 거부했다. 파리에서 민중반란이 일어날 가능성이 커짐에 따라 베르뇨는 7월말 비밀리에 국왕과 협상을 벌이려 했다. 8월 10일 파리 민중이 반국왕 봉기를 일으키자 입법의회 의장으로 있던 그는 왕권의 정지와 국민공회의 소집을 제안할 수밖에 없었다.
1792년 9월 20일 소집된 국민공회에서 그는 산악당(자코뱅 의원들의 별칭)을 공격하지 않았으나, 산악당이 그와 국왕의 비밀협상을 폭로한(1793. 1. 3) 뒤부터는 적극적으로 산악당에 맞섰다. 루이 16세를 재판하는 동안 처음에는 군주의 생명을 구하기 위해 노력했지만 왕의 사형 여부를 결정하는 투표(1793. 1)에서는 찬성표를 던진 다수 쪽으로 돌아섰다.
1793년 6월 2일 산악당과 제휴한 파리의 반란군은 베르뇨를 비롯한 28명의 지롱드당 지도자들을 가택연금시키도록 국민공회에 압력을 가했다. 베르뇨는 계속해서 반대파를 공격했지만 파리에서 도피하려 하지는 않았다. 7월 26일 수감되었다가 10월 30일 열린 혁명재판에서 사형을 선고받고 이튿날 단두대에서 처형당했다. 외젠 랭틸라크가 쓴 전기 〈베르뇨 Vergniaud〉가 1920년에 출간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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